성경 통독을 하다 바울은 어떻게 죽었는지 찾아보게 되다가, 로마 기독교 탄압 때 참수형을 당해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어 여러 가지를 찾아보다 유튜브에서 한 영화를 찾았는데, 기독교박해 때 로마 원형경기장에 수백 명을 앉혀놓고 굶주린 사자들을 풀어놓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사자들은 먹잇감을 살피며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물어뜯기 시작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걸 공포에 떨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갓난아기도 그 안에 있다.
제발 이런 곳에는 아이 좀 넣지 마라고!!!
내 마음은 이미 분노와 공포심으로 극에 달했고, 아기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하는 장면이 연출되자, 더 이상 볼 수 있는 심장이 아니기에 끄고 말았는데, 분명 사자가 그 여자를 덮쳐서 물어뜯었겠지.
왜 하나님은 다니엘만 사자굴에서 살려주고 나머지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은 죽게 놔두었을까.
“그 시간이 비켜 가게 해주십사..."
예수님도 잡혀가기 전에 두려워했다.
이 시간이 가능하면 비켜가게 해달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다.
생각만 해도 너무 공포스럽다.
예수님도 그랬는데 보통의 인간은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그러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걸 시험하고, 그 시험의 대가는 잔인하게 죽이는 거다.
내가 콜로세움으로 끌려가던 기독교인이었다면, 내 아이가 내 눈앞에서 사지가 뜯기며 죽어가는데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꼬리를 내리고 도망갔을까.
일제강점기 시절, 창씨개명이 떠오른다.
"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십오 엔 오십 전)"를 말하고 발음이 어눌하면 죽였던 것도 떠오른다.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죽는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할까.
예전에는 그깟 이름이 뭐라고, 창씨개명한다.라고 했는데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다 보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서일까,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영주권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깟 영주권 없어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너네들보다 더 세금 잘 내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 생각했다.
남편이 일본인이지만 성도 바꾸지 않았고, 통칭명도 쓰지 않았으며, 배우자 비자도 받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져서 가능한 일이지만, 옛날로 타임슬립해서 간다면?
내 사지를 비틀어 죽이고, 내 아이를 잔인하게 찢어 죽이는데, 내 이름 하나 지키는 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때로 들어간다면 나는 과연 내 의지를 지킬 수 있을까.
나는 두렵다.
내가 얼마나 비겁해질까 그것이 한없이 두렵기만 하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 중에 소위말해 스스로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꽤 있다.
배우자가 일본인이라 일본성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한한부부가 일본성 하나를 붙여서 사용하는 사람들 말이다.
"홍 길동"과 "김 영자"가 결혼했는데 스즈키라고 부르고 있다. 스즈키 길동이고 스즈키 영자다. 아이는 학교에서도 스즈키 테츠(哲, 철)로 불리지만 여권은 "홍 철"이겠지.
일본이름이 아니면 일본에서 살기 불편하다는 게 이유인데 사실 이유야 갖다 붙이기 나름 아닌가.
김영하의 [인생의 원점]이라는 책에서, 살아남은 주인공 서진은 내 관점에서는 너무 비겁하지만 과연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다를 수 있을까.
인아의 남편을 덮치려다가 타이밍 좋게 사체업자가 나타나 대신 일을 처리해 준다.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한다.
정신승리!
아큐의 정신승리가 이런 건가.
이 부류의 사람들은 평생 이렇게 비열하게 살면서 거기에 대한 자괴감은 느끼지 못하는 걸까.
서진 같은 부류는 정신적 고향이 없어졌다며 멜랑꼴리 한 요상한 감정은 있으나, 자괴감이나 비열함 같은 건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걸까.
그러나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하는 사람
저렇게 하는 사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비웃고 나쁘다 하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힐난하는 사람
그러나 딱 그 상황에 처해졌을 때 나라고, 혹은 너라고 별반 다를 수 있을까.
웹툰 "곱게 자란 자식"에서 청승댁이 주인공 여자애(간난이)를 팔아넘긴다.
청승댁을 욕할 수 있는가
누가 청승댁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과연 나는 내 양심에 한 점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