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기, 사진 찍기, 전시 관람하기

나의 번아웃 극복기2

by 정윤희


대중교통 이용할 일 없이 수원에서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서울에서 결혼과 출산을 맞이했었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카드에

교통카드 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 이상 현금으로 지하철 티켓을 구매할 수 없고

티켓을 판매하거나 안내하는 직원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며,

무인 판매기를 통해 1회용 교통카드를 구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산 후 100일이 지나도록 소아과를 제외하곤 집 밖을 나갈 일이 아예 없었기에

몇 달 만에 시도한 나들이 자체도 생소했는데,

지하철역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얼이 빠지고 말았다.

프리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 보자고 이 악물고 나섰건만 첫 관문부터 막힌 듯했다.

물론 오랜 서울 자취 경험이 있었던 나는 곧 바뀐 대중교통 시스템에 적응했고,

서울 지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덕분에 발 빠르게 어디든 다녔다.


아이가 많이 어렸을 때에는 친정엄마에게 맡겨놓고 나가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얼른 다녀왔다.

전시와 공연을 보고 비평을 쓰는 본업 외에도 생계를 위해 이일 저일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사실 짬을 내 전시나 공연을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갤러리들은 지하철역이나 버스정거장에서 한참 걸어야 하는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면 숨은 차고 입은 바짝 마르곤 했다.

그곳에서 굳이 거울을 챙겨본 적은 없었지만, 얼굴은 까칠하고 눈빛도 퀭했을 것이다.

교통비와 식비에 해당하는 작은 페이를 받으며 그렇게 짬을 내 돌아다니기를 몇 년 했다.

언제부턴가 이 많은 작품들을 관람하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긴 했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하철이 아직 개통되지 않은 신도시로 이사 왔을 때

차라리 이 일들을 그만둘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싶었다.


재인이는 이제 곧 6학년이 된다.

겨울방학을 맞이했지만 몇 시간 정도는 거뜬히 혼자 있을 수 있어서

이제는 외출을 해도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진작 갤러리나 공연장을 찾아다닐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2025년이 밝아오자 내게도 새로운 마음이 찾아왔다.

그래서 아무 보상도 없고 청탁도 없이 몇 년 만에 전시장을 향해 집 밖으로 나서보았다.

하필 강추위가 예보된 날이라 지하철을 탈까 운전을 할까 한참 고민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검색해 보니 노선이 꽤 괜찮았고, 이번에는 내 신용카드에 교통카드 기능이 확실히 장착되어 있었다.


삼각지 역 지하철 출구를 나서니 예쁘게 꾸민 젊은 친구들이 삼삼오오 다닌다.

핫플의 기운이 느껴졌다.

대학 다닐 때 여러 번 지나쳤던 곳인데 그때와 분위기가 비슷한 듯 다르다.

결혼 후 서울에서 오래 살긴 했어도 이곳으로는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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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홀로 걸을 때면 사진을 종종 찍어본다.

올해 아이와 캐나다와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좋은 사진을 많이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은 여행을 다니며 사진 찍는 걸 피곤하게 생각했었다.

뭐, 여행 자체도 그렇게 많이 다닌 편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녀온 여행에서도 사진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SNS를 시작해 볼까 궁리했을 때 제일 먼저 걸리는 게 사진 찍는 일이었다.


뭐든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나의 앞길을 많이 막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재인이가 뉴진스의 앨범을 개봉하며 동봉된 인쇄물과 사진을 보여주었다.

멤버들이 직접 핸드폰으로 찍었다는 사진은 다수가 초점도 맞지 않았고

왜 이 피사체를 선택한 건지 의도도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진은 왜 찍는 거야?"

"히히~"


아이가 대답은 않고 웃기만 했다.

재인이는 다니면서 새로운 걸 볼 때마다 열심히 핸드폰으로 수없이 사진을 찍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찍는지, 열심히 찍으면서 한편으로 왜 그렇게 대충 찍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뉴진스 멤버들이 찍었다는 사진을 보며 요즘 아이들의 정서를 내가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초점도 피사체도 분명치 않은 재인이의 컷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혼자 사진 찍는 일이 버거워지면 아이에게 사진 찍는 일을 맡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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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서 나와서 골목으로 들어서니 왜 젊은이들이 치장을 하고 이곳에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색적인 작은 가게들이 꽤 있어서, 아주 붐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쓸쓸하지도 않은 낭만 있는 분위기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분위기는 잠시 갤러리를 향한 여정에서 언덕이 나오고 가파른 계단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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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라흰갤러리라는 곳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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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주택들 사이로 누군가가 의지를 발휘해 예쁨을 채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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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릴 안내 액자 안에는 <호모모 나랜스>라는 전시명과 참여 작가명이 단출하게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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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호 작가의 작품들이다.

언뜻 아메리카 황금기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고급스러운 호텔의 내부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취방 그 자체다.

좀 허무하고 쓸쓸하다고 해야 하나,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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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해상도가 높지 않아 적당히 흐릿하다. 마침 저 얼굴 위로 조명이 들어오니 작품이 보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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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욱 작가의 <몰래 코를 후비기 위해 숨 막힐 정도로 상대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이의 초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세어보니 눈은 21개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저렇게 사력을 다해 남의 눈치를 본다고?

솔직히 당황스러운 작품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결혼 전에는 나도 그렇게 남의 눈치를 보고 다녔던 것 같다.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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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 그림 좀 마음에 들었다.

섬세한 피아니스트의 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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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수학을 가르치러 동네에서 두 집을 방문하고 있는데 마침 두 집 모두 개를 키우고 있고,

두 마리의 개 모두 갈 때마다 저렇게 나를 반겨준다.

고마운 녀석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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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니 같은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가 또다시 나를 맞아준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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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호 작가의 <Holy>라는 작품이다.

눈사람의 정수리에서 솟아오르는 기둥이나 화염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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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존재들이 자신의 가치를 치열하게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좀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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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본 적 있는 익숙한 오브제들의 집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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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품들을 옷걸이에 걸어놓아서 옷을 고르듯 작품을 고르도록 했다.

입구의 작품 가격 리스트에는 표구되지 않은 이 작품들의 가격도 적혀있다.

비싸다고도 싸다고도 할 수 없는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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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자 금성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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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웨이가 JTBC 뉴스룸에 출연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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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팝을 연상시키는 그림체이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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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선수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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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놓치고 갈 뻔했다.

내려오는 길에 마침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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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반짝이는 거리를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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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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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고 나오니 마음이 정화된 듯하다.

이렇게 홀로 걸으니 다시 서울 자취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바보가 되었던 경험도 잊어버리고,

육아로 점철된 일상도도 잊어버리고,

다시 대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이렇듯 기억들이 심하게 쏠려 있기만 하니,

롤러코스터를 타듯 인생을 살아왔나 보다.


매 순간 스스로를 강박적으로 몰아세웠던 내 탓이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몰입이 될 때면 아이에게 여지를 주지 않는 나이다.

그런 내게 재인이가 달콤한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엄마, 전시 잘 보고 와~"


고마워. 이제 엄마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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