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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Mar 02. 2023

한 달 동안 감자만 먹었더니

운동이고 뭐고 필요 없더라

첫인상이 끝인상인 경우가 종종 있다.

유전적인 것과 후천적으로 변형된 윤곽도 있지만 그런 디테일보다는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가 인상을 좌우한다.

캐나다는 과체중인 사람이 많지만 아파서 병원에 가면 특정 부위에 관한 진찰 외엔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 가서 병원에 갔다 온 지인들의 말은 다르다. 해외 동포들은 외모에 별로 신경도 안 쓰고 봐 줄 사람도 없어서 가꾸지도 않으니  외모가 풍성하다. 모든 병의 근원이 비만이니 한국 병원에서의 첫마디는 ' 살 빼세요'란다.

살이 얼마나 고집스러운데 말 한마디에 빠질 것 같으면 걱정을 안 하게?

또 오랜만에 고국의 친구를 만나서 친구가 가는 성형외과나 피부과에 쭐래쭐래 따라가 보면 ' 견적 많이 나오시겠네요'라는 말만 듣다 온다고.

사실 매일 장거리 운전( 집에서 직장이 차로 50분이라면 교통혼잡이 없어서 그렇지 서울, 수원 거리)을 하다 보면 운전석에 해가 비치는 왼쪽 광대뼈 쪽 피부의 어마무시한 선스팟들은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여기선 아무렇지도 않은데 한국의 티 없이 맑디맑은 백옥 같은 피부들의 여자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내 몸매를 보면서 욕 나올 때는 오만년도 더 되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10킬로씩 늘었는데 아이는 꼴랑 둘 낳았는데 몸은....

그 옛날에는 뱃살이 트는지 머리꼴이랑 몸매가 장난이 아니게 변해가는 지도 모르게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거의 죽을 뻔했었다. 요즘처럼 맞벌이도 아니고 외벌이로써 살림만 는데도.

물론 애기 기저귀도 천이요, 손빨래에다, 손 설거지 등등 노동력이 많이 들어갔다는 핑곗거리는 많지만.

천 기저귀 시대의 아들과 종이 기저귀를 찬 손자



감자만 한 달 먹은 적이 있는데 한때 유행하던 원 후드 다이어트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설사병에 걸려서였다.

감자의 다섯가지 효능및 부작용, 이런건 다 모르고.

10여 년 전에 터키에 가서 처음엔  낯설고 물 설은 중동의 사막나라에 살러 왔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도 잘 못 자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서 스트레스로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나날이었다.

마침 초여름이라서 마켓에는 로컬 과일과 야채들이 천으로 널려 있었고 식당에 가면 테이블마다 식전빵들이 가득한 바구니들이 놓여있었다. 누가 터키를 못 사는 나라라고 했나?

문화나 화려함 등은 시골과는 천지 차이가 난다 해서 터키의 중심도시인 이스탄불을 ' 이스탄불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온갖 유럽 브랜드가 넘쳐나고 캐나다엔 들어오지도 않아서 이름도 처음 들어본 유럽의 프랜차이즈 식당들, 유럽 럭셔리 카등등으로 꽉 차고 내가 직업상 만났던 젊은 터키인 엄마들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젊은 아빠들은 독일, 영국 등지에서 유학을 하고 와서 언어나 매너등이 세련되기가 말할 수 없었다. 터키라는 나라에서  이방인이 뿌리내리기엔 터키 말 배우기부터 기름밥에 곱창구이, 그래도 취향저격이 된 고등어 케밥조차도 기름져서 먹기가 괴로웠다. 우유도 3.5% 전지 우유라서 고소하기는 무지하게 고소한데

뱃속에선 겉돌다가 흡수되지 않고 나오는 통에.

버터를 들이붓는 이스켄데르 케밥과 피데


 

처음엔 설사약을 먹으면 낫겠지 하고 약국에서 지사제를 복용했으나 약도 안 맞고 물도 안 맞았다.

설사 때문에 병원을 갈 생각은 안 했다. 그까짓 설사이기도 하고 의료보험이 안 되서였다.

외국에 나가서 제일 힘든 것이 의료이다.

지인이 캐나다에서는 씽씽하고 그렇게 건강했는데 한국에 가서 며칠 만에 죽을 듯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한국인이 아니라서

입원비가 1억이 나왔는데 마침 여행자 보험을 들어서 약간 안심은 했지만 여행자 보험으로는 60%만 커버를 해 준다고.

나도 단기 여행을 갈 때마다 여행자 보험을 들기는 한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나  지병과 관계없는 병에 걸렸을 때만 커버를 해 주기 때문에 별 기대는 안 하지만 마음의 평안을 갖기 위해 들어둔다. 만약 국경 넘어 제일 가까운 미국을 가서 병에 걸리면 이를 악물고 캐나다로 와서 치료를 받는 게 낫다고. 캐나다 의료가 무료라서 대기 타다 죽기 십상이라는 악명이 높아도 응급 순서대로 죽지 않게끔은 무료의 대가를 기다림으로 치루고 무료로 치료를 받게 된다. 몇 억이든 몇십억이든.


한국 교민들이 가르쳐준 터키 쌀은 어찌나 찰지고 맛있던지 맵쌀이 거의 찹쌀 수준이었다. 풍성한 야채와  신선한 육류랑 과일 등으로 가정식은 내가 하니까 충분히 먹을만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이틀 하던 배앓이와 설사가 일주일이 가고 열흘이 가니 미칠 것 같았다. 입맛도 떨어지고 밥만 보면 공포감이 밀려왔다.  식량을 자급자족하고도 남아서  수출을 하는 터키는 농업국가의 면모답게 농작물은 싱싱하고 풍부했다. 그중에서 감자는 싸고 냉동 근처에는 가지도 않아서인지 찌면 포실포실했다.

그래서 백약이 무효이니 궁여지책으로 밥 대신 맛있는 감자를 먹어 보기로 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눈곱만큼씩 상태가 호전되어 갔다.

그러나 밥이나 반찬을 먹으면 도루묵이 되니  중독자가 아주 미칠 지경이 되었다. 라면도 먹고 싶고 짜장면도 먹고 싶고 국물은 절대 안 먹는데 국밥도 먹고 싶고.

  음식 상상으로 배 아픈 것을 이겨내고 있었는데 희한한 현상이 생겼다.

이상하게 늘 입던 치마가 약간 낙낙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꽉 끼던 셔츠의 허리 부분이 약간 꺼져 보였다. 늘 후디를 즐겨 입었는데 앞부분의 다리꼴 모양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면 뱃살이 그다지 안 잡혔다. 오겹살이 삼겹살로 변했네.

언뜻 본 팔뚝이 약간 날렵해지고 두 다리는

스키니진을 잘 소화해 낼 정도로 날씬까지는 아니더라도 보기에 거북하진 않았다.


하루 세 번 아무 반찬 없이 찐 감자만 딱 한 달을 먹었다. 나는 양고기에서 겨드랑 냄새가 나서 못 먹는다. 그런데 감자만 먹다가 뻥을 좀 보태서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것 같고 영양실조에 걸릴 것 같아서 양고기를 큐빅 사이즈로 볶은 것을 한 개 집어 먹어보았다.

냄새는 무슨 냄새? 고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부드러운 육질에다 씹을 때 스며 나오는 육즙은 천상의 맛이었다.

무슨 조화인지 설사가 멈추고  밥을 먹기 시작할 때 먹어보니 역한 냄새가 나서 영 못 먹겠더라.

포도잎으로 싼 기름밥과 갈은 양고기를 얹어 구운 라흐마준



그렇게 한 달간 감자만 먹고 날렵해진 턱선과

납작해진 배가 신기했다. 그렇게 푸시업을 하고 배를 짐볼에다 짓이겨도 안 빠지던 뱃살의 느닷없는 실종이라니.


그런데 사실 배앓이가 나은 것은 감자도 한몫 했겠지만  작은아이가 회사에 휴가를 내고 터키를 방문한 것이 컸다.

밤에 도착한 아들을 맞으러 아타튀르크 공항에 가서 아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이스탄불의 밤은, 처음에 도착했을 때의 저조하고 난감했던 기분과는 사뭇 달랐다. 밝을 때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분위기는 오래되고 낙후된, 난개발로 다닥다닥 지어진 건물들과 터키어로 쓰인 간판들, 마치 1960년대의 세운상가 길의 삼일 고가도로를 달리는 듯한 타임 리프 같은 황당느낌뿐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태우고 오는 차 안에서는 반가움과 그리움이 섞이면서 근거 없는  안도감과 앞으로 어떻게든 살아내야지 하는 생존감이 느닷없이 올라오더라.


그날 밤 이후로 거짓말처럼 설사가 딱 멈췄다. 그러다가도 신경을 좀 쓰면  반대로 변비가. 물론 뱃살도 얼마 후에 재빨리 복구되고.


모든 병의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스트레스가 주범이다.

또한 치료제는 뭐니 뭐니 해도 기분이 좋아야 한다. 항상, 끊임없이.

속이 뻥 뚤리는데는 국과 물김치가 최고지만 열 받으면 이것도 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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