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한다는 것이 힘이 들고 품이 드는 일이지만 막상 그 지역에 갔을 때 그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그들의 슬프거나 기쁜 감정을 느낄 때 얕은 한숨이 나오곤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언어를 모르면몸짓을 통해서만 생활과 문화를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낯선 도시에서 걸으며 집을 떠나 왔다는 해방감과 일탈에서 오는 홀가분함 때문에 몸이 붕 뜨는 것 같이 가벼워지곤 한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답답함이 가슴 한가운데를 강타한다. 왠지 자유로움 보다는 밧줄로 온몸을 옥죄는 결박감 때문에 숨쉬기조차 제한되는 느낌도 들곤 하고.
말이 안 통한다는 것 하나 때문에 진공 유리관에 갇힌 듯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비현실적으로 먹먹하다.그 나라의 언어를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자유를 만끽할까 하는 안타까움이앞서면서.
나는 모국어인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터키어를 구사한다.남의 나라 말을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구사? 그냥 웃고 말지요.
캐나다에 이민 온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전화가 오면 화들짝 놀란다.
영상 통화가 아니고 영어 통화라고 아시는지?
이민 초창기에는 ESL코스에 있는 아이들에게 전화하라고 시키고 전화 오면 무조건 불러내곤 했다.
그 당시에영어 앞에서 나는 늘 도망자였고 애들은영어 세상에서의 구원자였다.
나이가 들고 외국에서 살면 살수록 꾀만 느는 생존 전략에 따라서 한국 마켓, 한국 빵집, 한국 식당, 카페들을 뱅뱅 돌면서 다람쥐통의 다람쥐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민 와서 금방 열공했던 필살기 영어실력 그대로이고 지금은 노화로 키가 줄듯이 언어 인지력도 동시에 떨어지고 있다. 소싯적에 배웠던 프랑스어도 브러시로 쓸어봐도 이중언어국인 캐나다에서 찍소리도 못 내고 있다.
그러면 터키어는 어떤가.
영어 스펠링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되고 프랑스어, 영어 단어와 뜻이 중복되는 단어들이 많고 한국어와 어순이 같아서 나에겐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혼용해서 쓰는 일본어보다 오히려 배우기가 수월했다.
그렇다고 잘하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지만
일상생활에서 소통하기는 그런대로 괜찮았다.남의 언어로 돈 버는 건 어려워도 돈 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문제는 프랑스어를 고수하는 퀘벡주에 가서 '오케이'같이 간단한 프랑스어를 써야 할 때
대신에 터키어가 떠 오르는 망발 때문에 난감.
해외에서 그 나라 말을 못 해서 바디 랭귀지라는 그럴듯한 단어 말고 솔직히 원초적인 손짓 발짓으로 겨우 의사소통이 됐을 때의 만족감과 동시에 밀려오는 쪽팔림은 어디에다 호소할 수가 없다.
영어는 기본이요, 중국어 만다린어와 광동어, 일본어, 스패니쉬, 프랑스어, 영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청년이 밴쿠버에 살고 있다. 세 살 때 캐나다로 이민 와서 6개 국어를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인 이민자의 자녀로서영어로한국어를 배우기 쉽게 연구한 결과 한국어 문법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영어로 프랑스어 쉽게 배우는 법을 개발해서 개인적으로 가르치는데 배우는 사람들이 다른 원어민 선생에게서 배운 기간 대비 실력이 안 늘었던 것에 비해 회의를 할 정도로 일취월장했다고 한다.
나도 그의 책에 관심이 있는데 세명의 손자들이 할 수 있는 한국말은 갈비, 불고기, 라면 등과
애기 때 배운 배꼽인사와 사랑해요 하는 모션, 또 코로나 때 내가 하도 강조한 손 씻으란 말등외에는
거의 못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 책을 통해서 한국말을 배워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사람이 살아야 여행도 가고 죽을 둥 살 둥 배운 말도 쓰면서 외국의 문화와 생활,고유의 음식도 즐길것이다.
그래서 즐거움과 여유를 찾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삶의 여정이 계속되리라.
밴쿠버 병원에서 영양 분석가로 일하는 사람이 말한 일례를 들어본다.
주로 마약에 찌든 젊은이들이 응급실로 많이 들어온다고.
하루는 전신 마비 증세로 들어온 여자에게 의사가 식도 기능도 거의 마비가 됐으니 콧줄로 영양 공급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알렸다. 음식을 먹으면 기도가 막혀 죽을 수가 있다면서.
환자는 자기는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두려움이나 회환도 없다면서 콧줄을 거부하고 일반 음식을 먹겠다고 하도 주장을 해서 극소량의 음식을 허용받아 낮에 먹고
약물 남용 때문인지 그날밤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콧줄보다는 정식 음식으로 삶의 퀄리티를 유지하겠다면서 그렇게 죽어갔다고.
캘리포니아에서 의료계에 종사하는 조카가 목격한 코로나 시대의 슬픈 이야기가 또 있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떨며 시신을 운구해도 매장지부족으로 방치되던 때.
간호인력이 부족해서 동부의 뉴욕에서 간호사들을 급히 모집을 했었다.
일주일에 만불, 3개월이면 12만 불 즉 한화로 1억이 넘는 임금이었다.
미국 서부의 간호사들이 사명감을 장착한 채 대거 뉴욕으로 신청해서 떠나갔는데....
그런데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더러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코로나병동에서 감염되어서 그만.
내가 살았던 제3의 고향까지는 아니라도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신비한 이름의 동서양을 잇는 이스탄불이 있는 터키.
내가 살던 시기에는 거의 지진이 없었다.
한 번은 소파에 앉아 있는데 약간 흔들렸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흔들린 건가 생각함과 동시에 지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진이 반드시 온다는데 하며 여진을 기다리는(?) 동안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공포를 느꼈다. 주위의 한국 교민들 중에 1999년의 지진을 겪은 사람들은 몸서리를 쳤다.
한밤중에 호러 영화 '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처럼 침대가 앞뒤로 마구 흔들리는데 정말 무서웠다고. 정신을 차린 뒤에 이어 오는 여진은처음보다 훨씬 무섭고 공포가 밀려왔다며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