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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Mar 16. 2023

사랑의 매

나도 따귀를 맞았다

중학교 2학년이면 13,4세 얼굴에 솜털이 르르 하고 가슴이 봉곳하게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한 단발머리 소녀이다.

친구가 좋아서 늘 단짝이랑

등 하굣길에 재잘거리며 전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다녔다.

지금은 골목길인데 차에서 내려서 학교 정문까지의 길은 멀고도 멀었다.

그래서 친구가 더 필요했고 죽고 못 사는 단짝이 있었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와서 다 차렷하고 경례를 했다. 수업 전에 공지사항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나는 뭔가  좀 공평하지가 않은 것 같아서 속으로 욱해서 나도 모르게 '치' 하는 소리를 냈다. 조용한 교실에서 나 혼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화가 난 선생님이 소리 낸 사람 나오라고

해서 영문도 모른 채로 앞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따귀(귀싸대기)를 한 대 때리시더라.

세게는 아니지만 부모님한테 꿀밤도 안 맞아 봤는데 싸대기라니.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고 내가 좋아하던 국어 시간이

그다음부터는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중학교 때 싫어진 국어가 고등학교에 와서 너무 잘 생긴 남자 국어선생님 때문에 회복됐다.

사실  이야기 내용에 불만이었는데 선생님은 자신을 모욕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말씀에 불경한 반응을 한 것에 대한 야단은 맞을지언정 싸대기까지 맞을 일이었을까.


웬 단체 기합이 많았는지 반의 전체 성적이 떨어지면 1번부터 차례로 나가서 교단에 10명 정도씩 다리 뻗고 앉으면 담임이 긴 나무자로 발바닥을 짝짝 소리 나게 때렸다.

손바닥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귀를 잡고 흔들지를 않나 출석부는 그냥 출석부가 아니었으며 체벌의 종류도 하도 다양해서

다 어디서 생겨났나 의아했었다.


중학교 1학년이면 초등 졸업 후 중학교에 들어갔다고 으쓱해서 새 교복에다 큼지막한 가방, 하얀 실내화등으로 자부심이 뿜뿜한 때였다. 그런데 할머니 가정 선생님( 정년퇴직 전이니 50대,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은)이 갑자기 발검사를????

 두 달에 한 번이나 명절, 섣달 그믐날등,

날을 잡아서 동네 목욕탕을 가던 시절이었다. 푸세식 화장실에 토일렛 페이퍼는 언감생심 다 본 잡지나 신문지를 비벼서 쓰고 할머니 방에는 요강이 밤에 들어갔다 아침에 나오는 때였으니.

겨우 세수하고 이 닦고 학교 가기 바빴다. 목도 가끔 씻어서 어떤 때는 목에 로줄의 때도 밀렸다. 평상시에는.

그런데 발검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한창 예쁘게 꾸미기 시작하느라고 허리의 벨트 주름도 몇 개로 정하고 각 잡고 하다가 잘 안 어서 꼬질꼬질하고 냄새나는 발을 내놓으라니 매 맞는 게 낫지

고문보다 더 괴로웠다. 그 할머니 선생님도 그 벗은 발 꼬락서니들을 보고 기가 막혔는지 한 달에 한번 한다고 순해진 엄포를 놓으셨다. 랜덤이 아니고 날짜를 예고한다고.

누구나 다 그렇게 변변한 욕실도 없는 열악한 집 구조에다 한집에 아이들이 대 여섯이 우글거리니 그 입에 밥 넣어주기도 빠듯한 부모님들의 수고는 그것만으로도 벅찼던 그 시절이여.


어느 날,  수업 도중에 선생님 심부름으로 다른 건물로 갈 일이 있었다.

복도를 따라 가는데 너무 끔찍한 장면을 유리창 너머로 보았다.

나랑 친했던 친구가 앉아 있고 다른 애들은 책을 읽고 있는데 선생이 한 손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은 그 친구의 뒷목을 쓰다듬다가 얇은 여름교복의 앞섶으로 가는 게 아닌가?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해  혈압이 오른다.

선생의 권위로 눌러서 꼼짝 못 하던 어린 소녀의 비애와 혐오가 가득 찬,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었다.

60년 전의 동창생 중에 자기도 그 선생이 집쩍거렸다고 울분을 토한 적도 있었다.

선생도 아닌,  욕 나오게 만든 트라우마의 장본인은 이미 고인이 됐더라.

 

진짜 말도 안 되게 때리고 기합 주고 쓸데없이 땡볕에 운동장 몇 바퀴 돌게 하고 특히 여학생들 어디 때릴 때가 있다고 대걸레 부러뜨려서 엉덩이를 때렸는지.

지금 생각하면  헤라클레스 같이 대걸레 부러뜨릴 기운 있으면 집에서 아궁이에 연탄이라도 갈아주지. 동네에서는 선생 입네, 집에서는  가장으로서 존경보다는  돈 벌어온다는

꼴난 유세를 떨던 부류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이라고 다 어른이 아니듯이.

반면에 어린 소녀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었던 선생님들도 많으셨지만.


론 지금처럼 한 반에 학생수가 적은 것도 아니고 60여 명씩 되니 골치도 아팠겠지만 선생은 절대적으로 사명감이 있어서 천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반세기도 전의 순박하던 학생들에겐 사춘기란 말도 사치였다. 생존을 위해서 분투하는 부모님 생각을 다소곳이 따라야 했고 동생들 잘  거두고 언니, 오빠 말도 잘 들어야 했다. 반항? 절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면 선생들도 애들을 감싸줘야지 그렇게 명분 없이 때리고 소리 지르며 윽박질렀던가.


우리는 이유 없는 매를 맞아도 다 나 잘 되라고 드는 '사랑의 매'라고 배우고 그렇게 생각하고 묵묵히 맞았다. 그러나 권위에 억눌려 찍소리도 못 하고

추행 및 과도한 훈육에 시달려도 어서 그 한 해가 지나서 담임이 바뀌기만을 기다린 친구들에게는 지옥 같은 나날들이었으리라. '변태'라는 단어도 모르고 그 뜻은 더더욱 모르던 순진한 소녀들에게 자행한 그들.

하긴 갓 부임해 온 신입교사들이 군대 갔다 와서 20대의 새파란 청춘들이었으니 사명감만 장착했으면 좋으련만 본능을 제어하지 못한 인간들도 있었으니 당한 어린 여학생들만 억울하다.

우리랑 불과 10여 년 차이 밖에 안 났었는데.


고등학생 때 다시 국어를 좋아하게 해 주시고

백일장에서 상을 탈 정도로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해 주신 선생님 지금도 뵙고 싶다.

극히 일부의  현상 외에는 그리운 선생님이 훨씬 더 많다는 것에 안도한다.


반세기도 전의 라떼에 있었던 학창 시절 이야기, 정말 어이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이 뒤바껴서 학생이 선생에게 매를 들게 생겼으니 어떻게 좀 해얄텐데.

남학생들은 원산폭격이니 뭐니 해서 개 패듯 때려서 맞고 절뚝거리다가도 금방 잊어버리고 친구끼리 웃고 떠들고 했다나.


*수많은 좋으신 선생님들 외에 변태성향과 감정조절 장애를 가지셨던 극히 소수의 옛날 선생님들은 이 글을 싫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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