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거의 없어지고 대화를 기피하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것이 전부이나 강 씨 고집이 발현되기 시작한 때였다. 경찰이 마약을 소지한 것 같다해서 학교로 불려 갔는데 주머니에 CD를 넣고 가는 것이 불룩해서 신고를 했다나. 마약의 '마'자도 처음 들어보던 이민 초기에.
그제야 중, 고등학생들도 마약을 사고팔며 월남조직과 한국애들도 연루된 갱조직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춘기도 힘든데 마약문제까지 덮쳐오는서양 사회여.
사춘기도 없이 고딩을 지난 큰 애가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던 3학년 말부터 '닷컴'붐이 일기 시작해서 인턴으로 일을 하는데 스톡옵션까지 받으며 금방 청년 재벌 될 것 같은 예기치 않은 조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붐이 가시면서 허황된 망상은 깨졌지만 그 이후로 계속 IT계통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큰 애의 특징은 유난히 결혼에
목을 매더니29세에 결혼을 했다.
서양 아가씨와.
며느리는 한 술 더 떠서 아이들을 넷 아니면 다섯을 낳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포부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아이를 많이 낳아도 경쟁이 심하지 않으니까 사회적 갈등은 별로 없다고 본다만 한국 시어머니가 생각할 땐 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을 낳던 시절에는 '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캠페인으로 산아제한을 했던시대였으므로.
확실히 서양체질은 체력이 강하다.
아기를 막 낳은 산모가 양말도 안 신고 병실의 모노륨 찬 바닥을 걷질 않나, 샤워를 하고 나서 찬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질 않나 기겁을 하겠더라. 삼칠일은 외출을 안 하고 백일이 지나야 해산 당시 발어진 뼈 마디가 제대로 돌아온다고 심한 일도 안 했는데 말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농경 시대에 죽어라 노동만 하던 며느리의 허가 맡은 휴식이자 일에서의 해방이었을까. 오직 종족 번성을 위한 엄숙한 리츄얼이었을까.
2년 터울로 세명의 아들을 낳았다.
네 번째로 딸을 낳고 싶다고 이름도 지어놓았다가멈춰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이들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봐줄 때에는 반드시 두 사람이 다 필요하다.2인 1조가 되어서 뛰어도 역부족인데 만약 할머니 혼자서 아이들을 돌보면 몇 년 후에는 할머니 몸은 이미 아작이 나 있다.
애기만 봐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일도 해야 되고학교 라이드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애 보는 날,일단 아들 집에 가면 화장실로 직행. 내가 하루종일 화장실을 써야 되기 때문에 널브러진 칫솔통부터 변기청소 샤워부스 닦기를 하고 수건들을 챙겨 나온다.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감들을 헹궈서 다쉬워셔에 넣어 돌리고 식탁의자나 침대 위에 걸쳐진 옷가지들과 수건들을 걷어서 세탁기를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