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노래를 부를 때, 한 옥타브가 낮아진 키로 불러야 심신이 편안하다. 한때는 옥구슬이 쟁반에 굴러가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양희은의 '아침이슬'정도는 그런대로 불렀던 것 같은데. 게다가 통기타까지 치기도 했다. 그 시절 나에게 통기타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가수 이장희였다.
콧수염이 난 외모나 웅얼거리는 듯한 불확실한 발음에다 기존의 가사와는 확연하게 다른 호소력이 있는 가사를 들고 나타난 이상한 사람. 정형화된 한국 가요와는 전혀 다른, 흐느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음치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창법의 신인간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의 부모님들이 '과부틀'이라고 부르던 위험천만한 오토바이족이기까지 했던 그.
기타의 신처럼 보이는 수려한 반주에 틀릴듯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그의 노래와 연주에 매료되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차피 통기타 세대이기도 했고.
Paul Reed Smith상표의 Hollowbody II 통기타와 전기기타 두가지가 되는 기타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서 주변에 이름만이라도 아는 사람이 신문에 난 적은 절대로 없었다. 그런데 신문의 왼쪽 하단에 해외토픽란이 있고 그 옆에 '이장희 결혼'이라는 단신이 떴다.
그 배우자가 같은 학과의 선배라는데에서 그가 갑자기 먼 친척 형부라도 된 것도 같고 배신의 아이콘이 된 것 같기도 해서 그날부터 곡기를 끊은 것이 아니라 기타를 끊었다.
그의 결혼과 내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왜 그런 발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에 열광하는 팬덤의 소심한 반응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추억의 시절 1970년 대에는 남자들은 장발을 하고 개 혓바닥 같은 칼라를 한 남방을 개선장군처럼 입고 다녔다. 아가씨들은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서 짧으면 경범죄에 걸린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혹한의 겨울에도 짧은 치마에 비치는 스타킹을 신고 오돌오돌 떨면서 싸돌아 다니기도 했다.
지금 패셔너블하다고 폼나게 입고 다니는 옷들도 몇십 년 뒤에 확실하게 평가받을 것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여자가 나이가 들면 몸의 골격이 허물어지면서 어떤 옷을 입어도 안 어울리고 아무리 화장을 분장 수준으로 해도 거뭇거뭇한 기미를 감출 수 없으며 비대칭의 얼굴은 웃으면 마치 우는 것 같다.
우리 같은 동양인들은 털이 조금 사부룩하게 난 살구같이 비교적 매끈한 피부라서 털에 대해서 그리 민감하지 않다. 그러나 서양 여자들은 동양 남자만큼 털이 많아서 다리털로 시작해서 확실한 제모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공을 들인다.
서양 여자들이 그렇게 털에 어마어마하게 신경을 써도 노인이 되면 호르몬이 바뀌면서 코 밑에 거뭇거뭇한 수염도 나고 목소리도 완전히 남자처럼 변한다. 짧은 커트머리를 한 할머니들은 목소리도 거의 남자 목소리여서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남자 노인과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보통 뒤에서 보면 아가씨인 줄 알았다며 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귓맛이 좋은 농담이 서양 할머니들에겐 전혀 맞지 않는다. 내가 아는 어떤 서양 할머니에게 72세 치고는 얼굴에 주름이 없고 곱다고 했더니 목까지 올라온 스웨터를 확 내려 보이는데 얼굴과 비교할 수 조차 없는 목주름이 가득해서 깜짝 놀랐다.
그런 나를 보고 한다는 말이 몸과 얼굴의 늙는 속도가 다른 것이 자기 엄마를 닮는 유전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데 잠시 할 말을 잊은 적이 있었다.
젊었을 때 나타나던 성의 특징이 나이가 들면서 중성으로 되어감과 동시에 태도도 우악스러워지는 아줌마들의 웃음소리는 또 어떤가. 여럿이 모이면 예전에는 들어 볼 수도 없었던 희한한 웃음소리로 온 방이 군인들의 숙소처럼 우렁참이 가득하다. 부끄러움을 잘 모르는 것조차도 호르몬에다 핑계를 대면할 말이 없다.
이제는 집에서 브라를 하지 않는 것이 편하고(뽕브라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뽀글이 파마를 해도 아무렇지 않으며 식탁에서 꼭 한 다리를 세우고 앉아야 편하다. 젊었을 때는 세 명 정도가 모여서 이야기를 해야만 화제도 끊기지 않고 좀 쉬기도 해서 좋았는데 이젠 친구와 단 둘이 만나야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주거니 받거니 줄기차게 수다를 떨 수 있으니 대화의 패턴도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처럼 이상하게 변한다.
'미쉘 푸코'의 말처럼 '욕망이 있는 곳에 권력이 나타난다'는 것이 요즘의 세태에 맞는 것 같다. 돈도 외모도 몸매도 권력인 세상에서 나이가 들면서 상실감이 배가 된다.
오늘은 어쩌다가 이미 노인각이 된 가수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는 노래를 들어보니 그 옛날에 느꼈던 독특한 감성으로 친밀했던 감흥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막같이 말라서 버석하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에 약간은 촉촉한 물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 '늙어도 여자는 여자'라는 말에 반쯤은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