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재혼 꼭 해야 되나

자폐증 환자와 조울증 환자의 불안한 동거

by 그레이스 강

한국에 살다가 캐나다에 갓 온 사람들은 저녁의 붐비는 퇴근 시간에서 20분만 지나면 세상의 모든 빛들이 숨어버린 듯한 어두움과 적막감이 감도는 거리에서 한 숨을 쉬게 될 것이다. 한국은 현관만 나서면 온통 분위기 좋은 카페와 음식점이 즐비하니 침체되어 있던 기분도 일시에 업 되는 밤문화를 기억할 때마다 좋았던 기분도 캐나다에서는 순식간에 다운이 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동시에 캐나다가 일명 '재미없는 천국'이란 말을 백퍼 실감하면서.

쇼핑센터나 슈퍼마켓을 가도 손주 손녀가 주렁주렁 달려 있을 듯한 노인들이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휘어지고 갈퀴차람 꼬부라진 손가락과 검은 노인성 반점으로 얼룩진 손으로 10파운드 감자 자루를 들었나 놨다 하면서 계산을 하는 장면을 바라보아야 한다. 물론 기운이 센 서양 종족들의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뭐라 토를 달 수는 없지만 저 연세에도 저런 힘든 일 해야 하나 하고 다시 한번 한 숨.

혹시라도 누가 나에게 저런 일을 하라고 하면 도저히 못 할 것 같은 위축감이 온몸에 퍼진다.

한국에선 옆구리에 조금만 군살이 붙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밥을 굶고 스트레칭을 하고 오래 걷기를 하던 낭창한 몸매로 그런 강도 높은 노동은 할 수도 없을뿐더러 영어가 딸리는 이민자들은 언어장벽 때문에 말이 별로 필요 없는 그런 자리조차 얻기도 쉽지 않다.

다민족 문화라고 부르짖는 캐나다에서나고 부딪치게 되는 사람들을 보면 백인 얼굴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유럽 출신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하고 아시아의 인도 사람은 '이스트 인디언'이라고 부른다. 물론 아시안들 중에서 중국사람들이 인구의 10 퍼센트를 차지하는 밴쿠버는 쇼핑센터에 가면 거의 다 중국 사람들이다. 중국인들이 없으면 경제가 안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가 밴쿠버의 실상이다. 요즘은 나빠진 중국 경제 때문인지 집값만 잔뜩 올려놓은 채, 중국의 큰 손들이 빠져나갔는지 부동산업계가 조용하다.

주도인 밴쿠버 섬의 빅토리아는 태평양을 바라보는 기막힌 절경이 있는 도시이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함을 뽐내는데 영국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할 때 영국과 비슷한 입지의 섬에다가 비도 많이 오는 기후 때문에 덜 생소해서 이 곳으로 주도를 정했는지도 모른다. 식민지 시절에 인도인들을 하인으로 부리다가 이곳에 이주한 영국인 주인들이 죽으면서 인도 하인들에게 농장과 토지들을 물려주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랭리'라는 외곽 도시가 아주 시골이었을 때 그런 땅을 가지고 있던 인도 사람들의 광활한 토지들이 최근 개발 붐을 타서

인도 땅부자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많은 민족들이 모여 살므로 국제적인 맛집에 눈 호사와 입이 호강을 한다. 그러나 그런 표피적 삶의 이면에는 항상 숙제를 마치지 못하거나 시험지를 다 채우지 못한 채로 발을 동동 거리디가 꿈을 깨는 안타까움이 함께 서려있다. 이방인의 삶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뿌리가 얕게 내린 나무처럼 허약한 면이 있다.

만약 한국에서 살다가 캐나다에서 황혼 재혼을 하고 싶다면?

그것도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뇌와 말랑한 심장은 이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인생의 황혼기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민생활이 곁들여진 재혼이라면.

좋은 결혼이었든지 나쁜 결혼이었든지 지나간 배우자와의 복잡 다단했던 삶의 파편들이 심심하면 툭 튀어나와서 그 뾰족한 끝으로 살짝만 찔러도 '아' 소리가 난다는 혼자된 사람들. 재혼이라는 단어는 자신에겐 0.00001%의 확률도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도 언제 재혼을 할지 장담 못 하는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황혼 재혼.

인생의 가을 녘에 찾아온 망각의 소산물이라는 재혼에 조각이불처럼 덧대어진 낯선 땅에서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 이민까지도 감내해야 한다면.


#1 그동안 술 먹고 토한 토 냄새에다 입 냄새, 발 냄새 다 맡고 살았는데 또 다른 사람의 것(?)까지 극복을 해야 해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단연코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결혼은 없어요.


#2 시부모님 두 분이 50대에 다 돌아가셔서 남편이 단명 노이로제가 있어서 일주일에 평균 한 번, 심할 때는 세 번까지 병원을 가요. 조금만 아파도 참지 못 하고 무슨 큰 병이 아닌가 혼자 온갖 상상을 하다가 병원으로 직행.

그러니 살 수가 없어요. 병이란 것이 면역이 생기면 낫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지기도 하잖아요. 그러나 아직 음식을 칼로리 따지고 저울에 달아먹는 중증까지는 아니네요.


#3 남편이 외국에 오래 나가 있을 때 친정어머니가 아이들 다 키워주고 10번 이상 이사를 할 때마다 남편은 없고 친정식구들이 다 와서 도와주고 돌봐 주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자기만 외국에서 고생하며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고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을 다 내고 장모 생신 때도 멀뚱멀뚱, 만나도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딴청 하는 꼴에 신물이 나네요. 헌신했더니 헌신짝 된 친정 보기도 민망하고요.


#4 쉬는 날에 갈색 소파와 그 비슷한 색깔의 츄리닝 바지를 입고 누워 있어서 언뜻 보기에 소파와 구별도 안되게 혼연일체가 되어 하루 종일 뒹구는 모습을 보는 어이없음이란. 시마다 때마다 식사와 과일과 커피를 대령하고 티브이도 독차지해서 나는 구석의 보조의자에 앉아서 전화로 무료함을 달래는 게 고작이에요. 혼자 두고 나가기는 미안하고 같이 있자니 웅크린 동물처럼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최소한의 행동을 보는 것도 신경질 나요. 심부름은 계속 시키고.


그래도 남편이 있어야 핑계 댈 데가 있고 아이들도 엄마를 무시하지 않으며 병든 남편조차도 바람막이가 된다는, 혼자된 여자들의 충고는 귓등으로도 들리지도 않는다. 지금 현존(?)하는 남편한테 질려서 만약에 혼자가 된다 하더라도 재혼이란 화제 자체를 차단하려는, 남편 있는 여자들의 짜증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좋았던 일들은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여자들의 단편적인 애환은 그렇다고치자.


여자들이 일은 왜 그렇게 벌이는지 요란스러운 것을 묵묵히 참으며 받아주고 인고의 생활을 보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고 항변하는 남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흑과 백처럼 다른지 결혼의 부작용이라고 하기엔 서로가 너무나 멀리 가 있다. 슬프게도.

병을 고치는 약도 부작용이 있는데 쓰나미같이 덮치는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과 하물며 결혼에서랴.


부인과 사별한 후에 첫사랑을 만나서 결혼한 사람들을 보았다. 미처 한 달도 안 되어서.

사춘기 때의 풋사랑이라기보다는 결혼하려고 했는데 부모의 반대나 다른 사정으로 헤어졌다가 배우자와 사별하고 나서 혼자된 첫사랑을 찾아서 기다렸다는 듯이 결합한 경우도 있다.

외로움을 못 참는 성정을 타고난 남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남자들은 당연히 재혼을 생각해 보는 듯.


재력이 있는 부모가 재혼을 원할 경우에 자녀들은 특히 아버지가 재산을 날릴까 봐 우려하는 것을 보면 남자가 더 감성적이고 여자가 더 계산적이란 이론이 된다. 미드에서 보면 젊은 여자가 고령의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그의 무지막지한 재산을 빼 돌리고 심각한 범죄행위에 가담을 했다.

그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와서 상황을 이야기하니까 그 노인은 다 알고 있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래도 자기는 그 여자가 범죄자일지라도 나를 이만큼 사랑하는 척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며 상관없다고.

너무 노령이라 턱주름이 목까지 흘러내려서 셔츠의 단추조차 잠기지 않는, 노인의 사랑과 집착에 대한 당당함을 그 누가 말릴 것인가?.

할머니들도 혼자가 되면 시장이나 거리에서 첫사랑을 만날지 몰라서 항상 곱게 화장을 하고 외출한다나.

그래서 남자 노인들이 빨리 첫사랑을 만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랑의 열정은 유통기한이 있다지만 정과 책임은 무기한인데 서로 의지하고 둘이 누워 따뜻한 이불의 온기를 느끼며 식어가는 삶의 냉기를 덥히는 일에 이리도 난관이 많다.

젊었을 때의 치열한 삶을 뒤로하고 이제 옅은 죽음의 냄새를 맡기 시작하는 황혼의 마무리로써 재혼은 배부른 흥정인가? 아니면 마지막 남은 불씨를 살리려는 몸부림일까? 그들에게는 황혼 재혼이 남사스럽다고 눈을 흘기는 사람들에게 동조하고 싶지 않은 나름의이 분명 있을 것이다


깨끗한 캐나다의 자연 속에서 혼자된 노인들이 만나서 정답게 골프나 치고 맛집을 다니면서 오손도손 욕심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이 어쩌면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현실은 너무나 많은 명제들의 정답을 맞히라고 악을 쓰면서 힘없고 활기를 잃어버린 노인들에게 들이밀고 있기 때문에.

게다가 하루 종일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남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반응도 잘 안 하는 자폐증 남자 환자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캐나다 기후처럼 기분이 변덕을 부리는 조울증 여자 환자의 불안정한 동거를 지탱해줄 만한 근거를 황혼 재혼이 갖고 있지 않은 듯해서 그 단어 자체가 더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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