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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Jan 18. 2020

외국에서 본 양준일의 잃어버린 30년

레트로 열풍

요즘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버전보다 더 강도가 높은 '사촌이 땅을 사면 몸살이 난다'라는 사악한 표현이 돌아다닌다는데.

나보다 더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대중의 축복을 한 몸에 받는 사람.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가 아닌,  몰라봐서 죄송합니다라는 속죄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분위기가 팽배한 이상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일인이 있다.

나도 이번에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그의 퍼포먼스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으니.

몸에 리듬이 장착되어 몸삘로 무대를 휘어잡는 그는 진정한 엔터테이너인 동시에 음악과 춤을 좋아하다 하다 미쳐버린 프로페셔널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이미 눈을 버려서 딴 가수들의 퍼포먼스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니 큰일이다,

'come together'라는 비틀스의 곡은 내용도 별로이고 곡도 귀에 쏙 들어 오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양준일이 표현한 그 곡은 같은 곡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해석으로 편곡을 해서  황홀한무대를 선사했다.

무음 처리를 한다해도 그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마음을 터치해준 그를, 방송에서 비운의 천재라고 할 때  정도는 아니겠지 했던 내가 너무 오만했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코멘트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젊은 날의 무대를 보면 아깝다는 생각밖에는 안 든다. 그것도 30년이 지나버렸다는 것에 화가 난다. 넘치는 에너지와 자신만의 색깔을 표현하고픈 열망이 보이는데 그것을 펼쳐보지 못하고 사라져 간 그의 모습에.


제일 안 좋게 회자되는 사람이 출입국 관리소 직원인 것 같은데  90년대의 관공서는 지금의 공무원들의 서비스와 천지차이였다. 후진국에도 살아봐서 알지만   관공서의 일이란 뭔가로 기름칠을 해야만 돌아가는 구조였다.

아직도 공항에서 여권 뒤에 달러를 넣어야 통과되는 나라가 영화에도 종종 나오지 않는가.

공권력이 셌던 1990년 당시에 전주부였던 나도 미국 대사관에서 불쾌한 일을 겪은 적이 었었을 정도이니.

그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30년의 원흉이라고 뭐라 하지만 그 당시 시대상황으로서는 '저런 애를 안 받아줘야 우리 청소년들이  건전하다'라고 하며 자부심을 갖고 강직(?)하게 일처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내가 막았으니 30년 동안 너희가 이 정도 건전한 줄 알아라'라고 초지일관 꿋꿋할지도.

물론 그 시대를 겪었던 나의 개인적인 유추일 뿐이다.  


그의 공백기에 대해서 무척이나 궁금하고 뭐 하나라도 알면 퍼뜨리고 싶어서 안달이 나다 못해 현기증이 날 지경인데 파고 들수록 넘사벽의 좋은 인성에다 현자 같은 명언만 쏟아내니 의아해하면서 할 수없이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나이에 식당에서 웨이터를 하는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입 밖으로 내면  직업에 대한 편견이요.

내자니 갸우뚱. 그러나 요즘 대세에 눌려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  

그 이슈가 오히려 보물을 흙 속에 내팽개친 것 같은 미안함으로 작용해서 더 열렬하게 보듬으려는지도 모른다.


북미에서 구인난을 보면 '홀 서빙'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옛날에는 웨이터, 웨이트리스를 찾는다고 했으나 지금은 '홀 서버'라고 부른다. 전통을 지키는 프랑스의 음식점을 가도 '갸르송'이라고 부르는 웨이터들이 할아버지들인 경우가 많다. 인구가 많은 나라들은 무조건 젊은 사람들을 선호하지만 늙어가는 나라 유럽에서는

노인들의 서비스 업종이 아직 많이 존재한다.

'에어 캐나다'를 타 보면 케어를 받아야 할 정도의 할머니들이 빨간 매니큐어를 하고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띈 채로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보듯이.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는 경우에 기본급이 있는 경우가 있고 아무런 베이스 없이 손님들이 주는 팁이 수입 전부가 되는 경우도 많다.

도 바쁜 식당의 경우는 월 기본이 2000불에서 4000불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힘 좋고 싹싹한 아줌마들이 한 가게에서 십 년 이상 근무하는 경우는 주인과 가족같이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한식집에서 음식을 서빙하면서 제일 힘든 것은  돌솥 비빔밥.

무거운 돌솥을 쟁반에 몇 그릇씩 담아서 나른다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먹는 사람은 밥알이 살아있고 식지 않아서  좋지만 말이다.

요즘은 돌솥밥이나 뚝배기 설렁탕 같은 것은 카트로 옮기기도 해서 훨씬 나아 했다.

일식집에서 일 하는 사람들도 가벼운 일식 접시나 러브 보트 같은 나무그릇이 뭐가 무겁냐고 하겠지만 오래하다 보면 팔목 다 나가고 어깨에 석회가 잔뜩 껴서 '' 소리 나게 아픈 사람이 많다. 

밴쿠버에 이민 온 돈 많은 중국 아줌마들이 살을 빼려는 한 가지 목적만으로 식당에서 일을 하면 한 달 만에 딱 10킬로그램이 빠졌다고. 루머가 아닌 실화가 있을  정도로 식당일의 노동 강도가 세다는데 양준일이 그 일을 했다니 궁금증에다 애잔하기도 해서 특유의 동정심이 발동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내 아이들이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대의 시험문제를 보면 O X 아니면 틀린 답을 고르라는 시험문제가 많았다.

여기서도 답을 고르는데 객관식 문제이면 true or false로 맞춰보라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틀린 답 고르기 같은 부정적인 질문은 별로 없다. 캐나다에서는 맞고 틀리는 것에 대해 경계가 모호하다고 할까? 아니면 아예 없다고 할까?

물론 수학이나 과학 같은 입증된 공식은 정확해야 하지만 주관적인 문제는 거의 개인의 관점을 존중해 준다.

맞고 틀리다 보다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준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틀렸다고 야단맞지 않고 느적느적하면서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아가 형성되어 가는 것 같다.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는 것이 창의성을 길러주는 지름길인 것이다. 한국 아이들이 초등생일 때 이민을 오면 3학년 는 구구단을 다 암기해서 오니까 무조건 추켜주는 서양 선생님의 천재라는 칭찬에 우쭐해지지만 20단까지 외우는 인도 아이들과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리는 중국 엄마들의 극성 때문에 서서히 밀려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손가락으로 계산하고 매일 축구 시합이나 하고 깜깜할 때까지 집 앞에서 농구를 하던 서양 아이들까지 고학년이 되면 어느새 다 따라오고 그 강인한 체력 때문에 갈수록 학력격차가 아니라 체력차가 난다.

 일주일씩 밤샘을 해도 까딱을 안 하니 많이 안들 무슨 소용이랴? 나중에는 결국 체력 싸움서 밀리기 십상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패션에서도 누가 어떤 옷을 입으면 다 따라 입어야 했던, 그래서 유럽을 가면 관광 온 아줌마들의 뒷모습을 보면 똑같은 파마머리에다 알록달록한 고가의 등산복 때문에 바로 한국 관광단이라고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바로 그것이 양준일을 떠나보낸 이유 중의 하나지도 모른다.

30년 전에도 양준일의 활동에 호, 불호가 갈렸다는데 지금 컴백한 그가 비록 신드롬일 정도로 돌풍을 일으켜도  우리 집은 지금 호, 불호가 갈리는 중이다.

큰 애는 뉴스룸 인터뷰를 봤는데 아줌마 같다고, 사실 여자스러움이 깃든 말투에다가 자자분하게 말이 많기는하다. 그러다가 말 실수를 하까 살짝 걱정되기도 하는 중.

별 흥미를 안 보이고 작은 애는 자기 밴드 활동에 바빠서 시큰둥. 제일 만만한게 남편이

나 혼자 유튜브 클립을 보다가 남편에게 같이 보자고 하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 못해

몇 곡을 보다가 금새 코를 고네.


그의 잃어버린 30년이 그에게 독이 되었을 수도 있고 약이 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이가 들면서 더 성숙해지고 관대해져야 하건만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늙으면 머리카락도 힘이 없어서 직모였던 사람도 까칠해지고 더 꼬부라지듯이 마음도 더 꼬부라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플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양준일의 실체가 가수라기엔 뮤지션이고 뮤지션이라기엔 총체적인 아티스트인 그가 30년 후에 돌아와서 오늘 이 시간까지 보여준 모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던 까탈스럽고 주책맞은

나이 듦과는 정반대로이다.

쿨하면서도 솔직하고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미화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솔직함을 대하는 대중들은 오랜만에 접하는 신선함 때문에 더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캐나다에서도 자신의 이력을 이야기할 때 한 분야에서 20년이나, 40년이라고 하지 않고 꼭 30년 동안이나  일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그 경험이 대단하다고 자타가 공인한다.


양준일의 30년은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그의 인생의 일부분이었으며 일희일비하지 않는 내공도 쌓았으리라고 본다. 그것이 그의 음악에 녹아서 많은 사람들의 마른 장작과도 같은 마음에 감성의 불을 붙여주고 타 올라서 세상이 더 따뜻하고 서로에게 불을 밝혀주는 진정한 아티스트가 되어서 돌아왔다고 나를 세뇌시키고 싶다.


그런데 옛날 영화 중에서 'The Client' 나

'The Glass house'에 나오는, 동생을 돌보기 위해 마피아에게서 빠져나오는 어린 형이나 누나처럼 똑똑해서 나쁜 놈들에게 당하지 않는 주인공들이 있는데 양준일도 아슬아슬한 그런 영화의 주인공보다 더 일처리를 잘하기를 바란다.


또 한 가지 걱정은 입국 시 공항에서의 동영상 중에서 얼핏 보았던 오른쪽 귀 아래 턱밑의 조그만 혹이 악성종양이 아니기를. 다른 장면에서는 웨이브로 가려서 잘 몰랐지만.

'장 클로드 반담'도 오른쪽 이마의 돌출된 혹을 아직까지도 끼고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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