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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Dec 13. 2019

슈가맨과 양준일

너무 늦은 것은 없다

디트로이트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국경을 넘어

차로 4시간 정도 가면 되는 미국의 미시간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미국의 유명한 자동차 도시로 이름을 날렸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쇠락하여 지금은 재개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빈곤하고 흉한 도시로 전락하였다. 자동차로 흥한 도시답게 자동차 박물관등을 통해 공업도시의 면모를 살짝  엿볼 수는 있지만 연방정부 차원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계속 퇴락의 길을 걷게 될 조짐이 진작에 다.

그 도시에서 40년 동안 같은 집에서 건물 철거, 재건축 , 리모델링 등의 건축 노동자로 살아가며 뮤지션의 길을 가고자 했던 한 남자가 있다. 로드리게즈라는 멕시코 태생인 사람인데 음반을 내고 미국에서는 몇 장밖에 팔리지  않았던 무명가수.

그러나 미국에서 그의 음반 한 장을 사서 남아공으로 온 한 소녀 때문에 마치 들불이 퍼지듯 빠르게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일약 음악으로 남아공의 영웅이 된 그의 삶의 궤적은 다큐 영화 한 편에 다 담기엔 너무나 엄청난 반전의 역사를 썼다.

미국에선 Zero, 남아공에선 Hero.

그를 알아본 제작자들은 그를 가리켜서 재능 있는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선지자라고 했다.

멜로디는 유연하고 부드러우나 가사는 대단히 반역적이며 저돌적이라고.

남아공에서는  그 당시 국내에서  저항하는 세태에 맞는 국민가수 되어 떴지만 해적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실제로 돈은 다사람들이 벌고 그는 여전히 디트로이트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고.

가난하다고 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예술가로서

살아가지 말란 법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이만하면 충분히 선지자 내지는 선구자의 인생답다.



동부에서 두 주동안 우리 집에 놀러 온 동생이 노래를 듣는데 댄스 뮤직이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비트가 귀에 착착 감기는 것이었다.

다 늙은 동생이 무슨 그런 노래를 듣나 싶어서 물어보니 실검에 '양준일'이 뜨고 하도 난리를 쳐서 한 번 들어보는 것이라나. 나도 한 번 들어 보자 한 것이 요즈음 1일 1 양준일이 되어 버렸다.

매체에서 띄우면 같이 방방 뜨는 개 돼지 인증에다가 언제 차갑게 식을지 모르는 냄비근성 시전까지 하고 있는 나의 근황이 어이없다.


사방에서 30년 전 영상을 퍼 나르면서 파먹기를 하는데 유로댄스, 힙합과 리듬 앤 블루스를 합친

 잭 스윙까지 망라한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렀는데 사실 뉴 잭 스윙은 양준일 보다 약간 뒤에 이현도의 듀스가 그런 류의 음악을 했다고 프로듀싱을 전공한 작은 아이가 알려주었다. 양준일은 여러 장르의 음악을 시도하며 

한 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풍미를 했었기 때문에 방송사에서 내 보낸 자막처럼 비운의 주인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평가 되었던 것도 아닌것 같고

너무 짧은 활동 기간 때문에 잊혀졌을 뿐. 나름대로의 개성을 발휘했던 것 같은데.

처음에 14명의 소녀들로 구성된 일본의 '모닝구 무쓰메'와 유사한 '소녀시대'도 한참을 갔구만.


양준일은 10년 후에 이름을 바꾸어서 그룹으로 활동할 때에는 오히려 비슷한 음악의 아류로 되어버린 것 같아서 별로더라.

마치 MC 해머가 American Music  Awards에서 싸이와 조인했다해도 백댄서 느낌이 물씬 난 것 처럼 뭔가 녹아들지 않고 어색 어색.

나는 이번에 종편에서 '양준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는데  심사위원들의 혹평을 들으며 활동을 시작한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해서 묻혀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50세의 약간 삭은 외모와 스키니 하면서도 날렵한 몸매이지만 젊음의 탄력을 잃은 아저씨 느낌이 나는 벌어진 다리일지라도 양준일의 춤사위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냥 춤이라기엔 수련을 통한 절제의 열정처럼 느껴졌다.

약간의 재능에 무시무시한 연습어낸듯한 공장 댄스가 아닌, 그냥 물 흐르듯이 자신의 노래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내 춤이 바로 나예요'라고.


1970년에 '슈가맨'이라는 노래를 발표하고 28년 후에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상상을 초월한 열광의 콘서트를 했던 로드리게즈와 비슷하게 30년 만에 무대에 서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 양준일의 음악인생이 어쩌면 그와  닮은꼴로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추구했던 삶은 부와 인기라기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 가치를 알아가려는 몸짓을 춤과 소리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자기의 처한 곳에서 오버하지 않고 살아내려는 의지는 마땅히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요즈음처럼 물질에 매몰되어서 허덕이는 정신적인 빈곤자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로드리게즈가 한 말

'I'll pursuit my own happiness'

말은 쉽지만 그렇게 살기엔 주변을 돌아보면 걸리적 거리는 것이 너무 많네.

 만일 양준일이 영어로 이 표현을 방송에서 써도 이제는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고 춤 추는것을 좋아했던,

아니 지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인생의 관조를 편안하고 과장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로드리게즈와 양준일, 두 사람삶과 예술을 포기하지 않고 욕심없이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부럽도 부럽다. 그러나 목청을 높여 사랑의 찬가를 부르다가도 조금만 삐끗하면 들었던 꽃을 가차없이 던져버리고 대신에 돌을 들고 돌팔매질을 하는 팬들이 없기를 바라며.

양손에 꽃과 돌 대신에,  양손에 떡을 들고

대중만 바라보는 연예인들을 좀 격려해 주면

안 될까? 좀 흥한다 싶으면 분명히 흠집내기, 트집잡기가 있을텐데 클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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