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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Nov 15. 2019

이제는 암스테르담에서 사라진 것

시간 앞에서 겸손해지기

내가 터키에서 생활할 때 제일 의아했던 것이 의약품에 관한 것이었다. 혈압약이나 항생제 같은 약을 처방전 없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느닷없이 한쪽 코에서 코피가 나더니 조금 있으니까 다른 쪽에서도 코피가 나오는데 마치 수돗물을 틀어 놓은 듯이 좔좔 나오는 것이었다. 양쪽 코를 솜으로 틀어막고 입으로 숨을 쉬면서  응급실로 가니까 임시로 지혈을 하고 하룻밤 입원을 하라고. 프랜차이즈 사립병원인데 고층 빌딩에다 어찌나 호화스러운지 마치 호텔에 들어온 듯 했다.

훤칠하고 찐하게 잘 생긴  쾌남형 의사들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스태프들이 영어가 안 되면 어디선가 영어를 하는 코디네이터가 와서 통역을 해 주는 등 서비스 만땅. 그러나 의심이 많아서 인지,  잇속에 밝은 아랍 상인들의 후예여서인지 선불을 하고 나서야 처치를 할 수 있다고 코를 막을 탐폰을 핀셋에 들고 있었다.

외국인 응급환자는 골든타임을 놓쳐서 죽던 말던.

 

그 당시 캐나다를 떠난 지 6개월  이내기 때문에 병원 서류를 작성해서 캐나다에 보냈더니 캐나다 의료보험에서  치료비의 반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전날에 터키 부동산과 돌아다니다가 시내에서 어떤 집을 보러 갔는데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내려갈 때는 괜찮았었는데 되돌아 나오는데 가파르기가 거의 수직인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한 곳이었다. 터키 아줌마 부동산 중개인이  차를 수동으로 작동하며 올라가는

 앞에는 언덕이요, 뒤를 돌아보 낭떠러지에다가 이스탄불 시내가 다 보이는 그런 죽이는 멋있는 뷰 때문에  아차하면 차가 뒤로 굴러서 죽을 뻔했다.

이스탄불에는 언덕이라는 뜻의 '테페'가 많은 동네인데 그 단어는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죽음의 테페'문에.


새로운 비즈니스를 오픈하는데 나라마다 다른 시스템에다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닌 터키란 나라에서 맨땅에 헤딩하려니. 극한 스트레스때문에  코로는 코피, 생전 변비라고는 없다고 자부했는데 계속되는 변비에 치질이 생기면서 위아래로 피를 쏟으며 이스탄불을 피로 물들였다.


모든 검사 후에 원인은 혈압이 높으니 혈압약을 장복해야 한다며 처방전을 써 주었다.

약을 다 먹은 후에는 처방전 없이 그와 똑같은 약을 처방전 없이 약국에 가서 다시 살 수 있었다. 별일이 없으면 몇 년을 병원에 가지 않고 처방전도 없이 약국에서 사서 복용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것은 3개월마다 병원에 가서 의사가 혈압을 재면 수치가 더 올라가 쳌업을 하는 번거로움은 없어서 좋기는 지만 좀 찜찜했다.

인구는 많고 의료보험이 잘 안 되어 있기도 하지만 영리 병원과 정부 병원의 시설 차이는 엄청나다.

보험이 적용되는 병원은 바글바글하고 시설도 열악한데 사립병원들은 시설과 의료진이 초호화판이다.

의료분야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의사들은 가까운 독일로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실력들이 좋다고 한다. 의료 장비들도 으리번쩍하고 그 장비들을 돌려야 하니 어떤 때는 외국인들이 과잉 검사에 시달리는 호구가 되기도 한다.

의약품 역시 독일 약의 원료로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기분상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종합  감기약.                   근육통 약


서른 알에 1불 정도 되는 종합 감기약은 조 과장해서 신종 플루에도 들을 정도로 약효가 좋다.

내가 캐나다에 올 때 가져온 그 감기약을 다 먹고 터키에서 놀러 오는 지인에게 부탁해서 지금도 갖고 있는데 열이 나고 으슬으슬할 때 한 알을 먹고 자면 몸살감기가 뚝 떨어진다. 몸이 풀리는 기분이 순간순간 느껴질 정도로 효과가 어찌 좋은지 아껴 먹고 있는데 거의 다 떨어져 가는구나.

이가 쑤실 때에도 '아목실린'같은 항생제도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나라가 터키였다.

파리에 살던 지인도 프랑스도 약국 약을 강하게 해서 서민들이 병원에 안 가고도 나을 수 있게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캐나다의 약은 처방전이 있 항생제도 무지 약해서 잘 안 낫던데.


'독일'하면 정교한 기계로 유명하지만 의료부문에서도 그 기술이 뛰어나다는데 그 근처 동네에서 별것은 아니지만 약간 실감을 했다. 비약을 하자면 나치 독일에서 자행하던 '홀로코스트'로 인해 영문도 모르고 수용소에 끌려 온 사람들을 나치 의사들이 생체 실험을 통해서 많은 임상으로 인류에 유익을 주는 의술을 개발했다면 그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극단적인 다윈주의자들의 이론과 비슷한 우수한 종족만 살아남기가 먹혀 들어간 광기의  시대가 있었다. 유대인, 집시, 장애자, 사회 부적응자 등 등을 멸종되어야 할 열등한 종족들로 분류하고 학살한 '홀로코스트'.

그 광포한 학살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안네 프랑크'하면 어린 나이에 그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가슴 저린 일기를 쓴 인물이다.

나는 그녀가 왜 암스테르담에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그녀의 가족이 프랑크푸르트에 살다가 나치를 피해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사를 한 후에 가게의 뒷방에서 살다가 밀고로 포로수용소에 잡혀갔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에 안타깝게도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좁은 하천 앞에 있는 평범한 건물 중의 하나인 '안네 프랑크'의 집은 한 소녀의 희망과 두려움, 굶주림과 삶에 대한 애착을 다 묻어둔 채 보통 집처럼 서 있었다.  


집 앞을 지나가는 군화소리, 군용차들과 땅을 흔드는 탱크의 무시무시한 음들을 들으면서 발각되면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가족들. 그들의 애처로운 눈빛과 몸짓들이 이젠 다 역사 속에 묻힌 채, 관광객들의 작은 한숨소리만 차 있는 좁은 계단을 오르면서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나치시대의 영화를 보면 게슈타포 즉 국가 비밀경찰들의 육중하고 살벌한 복장과 그에 걸맞은 사이드 카의 위용이 더욱더 그들의 광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 사이드 카는 바퀴 세 개의 오토바이인데 운전석이 있고 옆이 통 같은 것이 달려 있어서 게슈타포 장교가 그 통에 타고 긴박하게 지시하는 장면이 곧 잘 나온다.


큰 아들이 차를 너무 좋아하는데 갑자기 영화에서나 보던 사이드 카를 구입한다고 하더니 '우랄'이라는 러시아 업체에서 생산된 것을 '켈로나'라는 도시까지 가서 사 왔다.  

실제로 그렇 빠르지도 않고 커브를 운전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뒤집어질 수도 있다고.

 영화에서 사이드 카를 타고 신나게 질주하는 것은 영화를 위해 몇 초 찍은 것에 불과했구만.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안네 프랑크'가 숨을 죽이며 어서 지나가기를 바랐던 게슈타포의 사이드 카를 불과 70년 후에  독일인도 유태인도 아닌 한국인인 나의 아들과 손자가 타고 밴쿠버 도로를 달리고 있을 거라고 히틀러는 상상이나 했을까?

극단적이고 혁명적인 꿈을 꾸었던 나치 시대의 우성인 '아리안족'만 살아남아야 된다는 위험한 이념으로 숱한 죄 없는 사람들을 살상하는 것으로 역사를 더럽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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