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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Oct 09. 2020

이런 남편, 저런 남편

알박기도 하고 대못도 박고

외국으로 이민을 갔을 때 제일 처음 만난 현지인에 따라서 이민 생활의 조짐이 느껴진다. 내가 토론토에서 처음 만나서  밴쿠버로 이사 오기까지 3년간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아니 나의 이민 생활 정착을 도와주었던 그녀가 내가 이사한 후 3년쯤 뒤에 세상을 떠났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귀여운 딸 셋을 남겨놓고.

밤에 갑자기 배가 아파서 응급실을 가서 대장암 판정을 받고 그 자리에서 수술을 하고 거의 쌩쌩한 채로 2년을 활발하게 살다가.

건강해도 너무나 건강해서 병은커녕 피곤이란 단어는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갓 온 나 같은 사람은 애기 취급하면서 온갖 일을 다 도와주기도 하는 것을 보고 기가 딱 질릴 정도로 힘도 세고 일 처리도 척척 잘하는 만능 여인이었다. 힘든 사람을 도와주길 좋아하고 집에서 차려 먹이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큰 밴에 운전 못 하는 할머니들을 가득 태워서 모시고도 다녔다.

병원 영어가 안 되는 사람들  병원 통역도 많이 해주고 한국식 정육점에서 수 십 파운드의 고기를 사 와서 나누기도 하는 등, 봉사를 많이 하면서도  자신의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민 동기인 다른 친구와 가게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배우기도 할 겸 갔다가 하루 만에 손을 들었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되니 밤에 다리가 퉁퉁 붓고 손이 마비되는 통에. 혹독한 이민 생활을 견디기에는 애초에 글렀지. 특히 사무실 근무만 하던 남편들이 이민을 와서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없었다. 힘을 쓰길 하나, 영어를 잘하길 하나. 그래서 한국 남자들이 이민의 경쟁력이 없다고 그 당시에 이야기했었다.

그렇게 일 잘하고 씩씩하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가고 늦둥이인 막내 유치원생 딸은 다 커서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위의 딸들도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데 항상 문제는 남편이다. 아내 사별 후의 남편의 존재가  얼마나 위태위태한 지는 척 보면 알지 않는가?

                내가 살던 동네와 콘도


나는 토론토 노스욕이라는 지역의 콘도에서 살고 그 친구는 우리 집 창문에서 보면 길을 따라 몇 블록 지나서 사는 주택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살았다. 그녀가 떠난 후 몇 년 뒤에 그 지역을 재개발한다고 그 열에 있는 집들을 시에서 매입을 하려고 했다.

그 지역에 공원 조성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토론토는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밴쿠버의 낡은 지역을 재개발할 때에는  개발 업체에서 단독 주택들을 부수고 고층 아파트를 지을 때 한 주택당 시가의 3배를 주고 저층 아파트를 지을 때는 2배를 계산한다. 만약 헌 아파트 단지를 통째로 사들일 때는 2~3배의 가격으로 네고를 해도 싫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주민의 80% 정도가 찬성하면 팔게 되어 있다.

친구의 집도 시에서  매수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는데 남편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내가 살던 집을 떠날 수 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몰던 밴을 뒷마당에 세워 놓아 두었었다. 그 집을 안 판다 할지라고  시에서 방침대로  시행을 한다면 그 집만 빼놓고 삥 둘러서 공원을 조성할 것이다. 그 친구가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건만 멋 모르고 의욕 충만했던 이민 초기에 정말 귀한 친구를 만났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토론토만 해도 그 당시에 북극처럼 알려져서 춥고 덜 개발된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일요일에는 모든 슈퍼마켓이 영업을 안 하고 공산품도 살 것이 없을 정도로 후졌다. 한국 식품점도 몇 개 안 되고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집들은 눈폭풍이 많이 오는 탓에 돌로 견고하게 어서 운치가 있고 웅장했다. 초대를 받아갔던 어떤 집은 호텔처럼 웅장한 네 기둥이 있는 현관에 차를 댈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추운 지역이라서 대부분 지하실 있는데 그곳은 여러 대의 냉동고(만일에 폭설 때문에 식품을 못 살 경우를 대비해서)가 있었고 아이들 놀이방이나 게스트룸으로 아늑하게 꾸며 놓았다. 한국에서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에 살다가 이런 집들을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는 콘도의 2층에서 살았는데  겨울에 도착해서  집에만 있었는데  안정이 되어 가면서 건물 내부도 돌아보니 우리 집 바로 아래층이 수영장이었다. 남자아이 둘이서 레슬링 하던 빙 룸 바로 아래가.

벽에도 구멍 내던 아이들이라 밑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장애도 느꼈던 웃지 못할 이민 초기였다.

영하 20도의 밖에서는 주먹만 한 눈송이가 펑펑 내리는데 수영장 안의 따뜻한 자꾸지에서 바라보던 바깥 풍경이 아련한 꿈속 같았다.

험난한 이민 생활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는 철없는 시절이었지. 그때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 친구는 가고 없어도 지금도 그녀가 살던 집에서 살면서 재혼도 안 하고  아이들 다 결혼시키고 꿋꿋하게 알박기를 하고 있는 그 남편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무슨 21세기의 순애보인가.


이제 따뜻한 서부로 와 볼까?

한 마디의 토를 달 수도 없도록 완벽한 친구가 있다. 늘씬한 체형에 롱다리, 성형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인상과 무한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

뛰어난 예지력이 있음에도 교만하지 않고 상대방의 좋은 점을 먼저 보고 항상 칭찬을 하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편견이 없는 친구이다.

어쩌면 한 번도 남의 험담이나 부정적인 말을 한 적이 없다. 한 마디로 인격이 성숙한 친구이다. 그런데 반해서 남편은 입으로 다 까먹는 타입이다. 부인은 이민 온 한국 남자들의 특성상 한국에서는 잘 나갔다가 이민 와서 기죽을까 봐 많이 우쭈쭈 해주고 일을 하면서도 김치를 박스로 담고 저녁에는 꼭꼭 집밥을 하는 등 열심히 살았다.

남편이 조금만 도와줘도 등을 두들겨주며 엄지 척하며 남편을 격려하는데 남편은 부인이 한 일에 대해서 칭찬은커녕 '그까짓 것 아무나 다 한다'라고 말해서  김이 팍 샐 뿐만 아니라 얄밉기 그지없다. 여자가 하면 얼마냐 하겠냐는 가부장적인 생각이면서도 반대로  아내에 대한 애정이 집착 수준이어서 아프면 온갖 시중을 다 들어준다. 즉 일은 무지하게 많이 하면서도 투덜거려서  고맙다는 소리는 커녕 공도 없게시리.

그렇게 별 일도 아닌 것에 언어폭력을 가할때 본인의 입을 거울로 보면 좋겠다는 아내.

얼마나 흉하게 입이 나왔있는지를.

남의 가슴에 말로 못을 박고도 어찌 나 잠을 잘 자는지 어이가 없다. 남자들 불면증 있다는 소리 거의 못 들어봤다고.


사랑은 상대방을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고 우리에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가 아닌,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해주려는 배려인데도 말이다.


그러다가 비즈니스를 하게 되어서 잘 굴러가는데 이상하게도 외벌이로 잘 벌면 부인한테 인심도 쓰고 아이들 키우고 이민 초기에 같이 고군분투하던 걸 생각해서 좀 잘해주면 어디가 덧나는지 꼭 부인도 공헌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해주면  딱 그만큼만 잘해주는 등, 공짜로 밥을 먹여 주는 것 같이 생색을 무지하게 낸다. 돈 버는 유세를 할 수 있는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그 친구를 만나면 '아직도 이혼 안했냐? 고 농담처럼 뼈 때리는 말을 한다.

친구의 부모님은 과하게 개방적인 분들 이어서 아들, 딸 구분 없이 너무 자상하고 항상 칭찬해주면서 키우셨다고 한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들이 엄하게 교육시키셨던 것과는 180도 다르게  꿀밤 한대 없이 키우셨다는데.

그래서 남편의 가부장적이고 아이들한테도 따뜻함보다는 군대식으로 강압적으로 하려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내가 종종 ' 친정이 너무 가정환경이 안 좋았다' 고 반어법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면 말로만 갈구는 이런 남편도 감지덕지할 텐데

 도대체 왜 저러는지, 말은 왜 저렇게 상처될 말만 골라서 하는지 이해를 못 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으니.

다행히 그렇게 집착을 해도 의처증은 없으니 자기 나름대로 사랑의 표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넘긴다고 한다.


있을 때 잘하기도 힘들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그리워해 봐도 소용없는 줄을 하루라도 빨리 알아야 할 텐데.

인간이 미련하고 자기 방식을 고수하려는 아집과 손해 보기 싫어하는 이기심은 끝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지나친 욕심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철들자 망령이라고 때는 늦는다.

어차피 원 웨이 티켓 한 장 달랑 받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왜 그렇게 오픈되지 못하고 고집을 피우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잘 났다고  생각하고 높이 올라가 봤자  태양에 날개가 타 버리는 일 밖엔 없지. 교만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 이건만.

 

부부로 만나서 그 인연이 다 할 때까지 잔잔하게 아껴주고(자기 방식이 아닌 상대방을 배려한)  쓸데없는 잔소리 좀 제발 하지 말고 평온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도 불가능한 것인가?


죽은 다음의 순애보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오늘 하루 거슬리지 않고 살아주면 고맙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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