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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Oct 28. 2020

요양원에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하루는 길고 일 년은 빠르네

요란한 2020년도 저물어 간다.

70대는 70마일로, 80대는 80마일로 세월이  달려간다고 노인들이 말하곤 한다. 말이 마일이지 80마일이면 거의 130킬로미터인데 차로 달리다가 사고 나면 그냥 는 과속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몸과 마음 위로 흘러가는데 당최 가로막아 서서 멈추게 할 도리가 없다.

밴쿠버에 드디어 한인 요양병원이 생겼다.

한인사회에서 여러 경로의 도네이션을 모아서 정부에다 기부한  노력 에 전체 빌딩의 한 층을 한인 고령 환자들만 수용하게 되었다. 40명 정도의 환자를 받을 수 있다는데 보건국에서 의료 기록을 토대로 환자 및 보호자와 몇 번의 인터뷰 끝에 결정을 해서 확정을 하고 들어갈 수 있다.

화장실이 딸린 일인실만 있는데

비용은 소득 여부에 따라 결정되며 최고 월 7000불에서 저소득층은 1200불 정도 선이다.

예를 들어서 소득이 많은 사람으로서 정부의 혜택이 전혀 없는 경우에 부부가 함께 들어가면 한 달에 15000불인 경우도 있고 혼자 들어가면 3000불인데 부부이면 한 달에 3300불을 내다가 배우자가 죽어서 혼자 남게 되면 다시 일인이 3000불을 내야 하는 곳도 있다. 정부보조가 있는 곳부터 완전 사설 요양원의 경우까지 천차만별이다.

캐나다 요양원에서도 항상 이슈가 되는 것은 abuse와 neglect이다.

자녀들이 찾아가 보면 얼굴이 멍이 들어 있는 모친을 보거나 제 때에 기저귀를 안 갈아줘서 악취 속에 누워 있는 눈의 초점을 잃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녀들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탈수현상에 시달리고 물을 많이 먹으면 소변을 많이 봐서 귀찮다고 물을 많이 못 마시게 하는 노인들의 오줌 한 방울에서 나는 냄새는 말도 못 하게 지독하다고 한다.

특히 집에서 노인을 돌 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며느리 보기 미안해서 기를 쓰고 화장실을 가다가 미처 참지 못하고 한 방울이라도 마루 바닥에 지리면 그 냄새가 토할 만큼 역겨웠다고. 그래서 노인들의 꿈에도 소원은 자다가 곱게 죽는 것과 죽기 전날까지 제 발로 화장실 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제 아무리 운동을 철저하게 하고 음식을 주의해도 가는 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가 바로 요양원 내지는 요양병원이다.

 노인들이 낙상사고 후에 부러진 곳을 치료한 후에는 집으로 모실 것인지 요양병원으로 보내드려야 할지를 반드시 정해야 한다. 요양원이야 미리미리 알아보고 답사도 할 수 있지만 요양병원은 대개 급작스럽게 정해진다.  그러면 노인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원해서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노인들만 가득한 요양병원으로 간다는 사실에 죽음이 갑자기 가까워지는 듯이 집에 가고 다고 울부짖다가 다른 병원의 침대로 다시 돌아간다. 그것을 보는 자녀들도 괴롭지만 냉정한 현실로 돌아와 보면 하루 종일 간호할 여력도 없는 데다  늘어져서 무거운 노인을 밤에 가족이 돌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제로 오는 병인의 경우도 밤에는 퇴근하고 없으니.  

노인이 있는 집이 지혜로운 노인으로 인해 자녀 손들이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그림은 단지 그림일 뿐이다. 물론 그림같이 사는 집도 많이 있지만. 모두 다 걱정에 불안에다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젊은이들은 각자 자기 일로 바쁘고 며느리나 딸도 맛집이다 카페다 하고 잠깐 나가서 기분 전환을 하고 돌아와도 노인은 방 한 구석에서 자리보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현관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


반대로 노인들은 뭐, 아무 생각이 없을 까? 살아온 세월만큼의 회환과 거동이 불편한 자신의 신세가 믿어지지 않는다. 원하든 원치 않든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 했고 바로 종족 보존을 위해 자식을, 특히 아들을 많이 많이 낳았어야 하는 굴레에서 손톱이 닳도록 일을 하고 시부모 봉양하고 자녀들을 키운 후에 자신을 돌아보니 사족을 쓰기 힘든 노인이 되었네.

젊은 시절에 살아내려고 애썼던 그 시간들을 보상받기는커녕 오래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욕이 되어 돌아오는 것 같은 생각에 어두운 방 안(전기를 아끼느라고 불도 켜지 않은)에서 한숨만 쉬어 보아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그 극성맞은 시어머니의 아들 타령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을 낳아서 금이야 옥이야 두 여자가 정성을 다해 키웠건만 혼을 시키고 나니 처가에만 엎어지질 않나 제 새끼밖에 모르고 어미는 남의 집 아줌마 보듯 하는 것 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다가 집을 넓혀서 어머니 모시겠다고 시골집과 땅을 처분해서 합가 후의 기막힌 사연은 모두 다 익히 알고 있는 눈물겨운 사연이다.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가 된 것도 서러운데 마루에서 오가는 할머니가 유령처럼 느껴진다고 소스라치는 손자들과의 동거는 예 악몽이다. 할머니는 그래도 아이들이 어릴 때 키워주기라도 했지 할아버지 혼자 남겨져서 자녀들과 살게 되면 찬밥도 그런 찬밥이 없으니 아예 언급할 필요가 없다.

캐나다에서는  불편하고 느려빠진 의료와 연금제도 제일 좋은 사회 안전망으로 친다. 집이 한 채 있으나 소득이 없으면서 정부보조의 요양시설에 들어가면 한 푼도 내지 않는다.

한국만 해도 120만 원 정도는 내야 해서 자력으로 안 되면 자녀들이 모아서 내는 데에 비해서.

 비용을 자기가 받는 연금이 한 달에 1500불이면 1200불의 비용을 제하고 300불은 용돈 정도로 받으면서 요양시설에  있다. 집에 남아있는 배우자는 자신의 연금을 별도로 받고. 두 사람이 한 에 살 때는 각자의 연금을 합친 액수보다 몇 백 불 적게 나온다. 노인들이 캐나다 좋은 나라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는 이유는 정부에서 무료 의료와 무료 요양시설(사립은 빼고)때문이다. 게다가 자식들에게 손 벌릴 필요도,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남처럼 혹은 손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자식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땅이 캐나다이다.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50세가 넘어도 제 밥벌이나 구실을 못 하는 아들이   50+ 노인 아파트에 얹혀살면서 부모의 노인 연금을 축내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자식이 애물단지인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한 친구는 자녀 둘을 멋지게 키우고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딸의 딸까지 캐나다에서 1년을 키워 주었다.

그가 하는 말 '우리가 렇게 2대에 걸쳐 기저귀를 갈아줬는데 우리가 늙으면 우리 기저귀를 한 번이나 갈아주겠어?라는 질문이 너무 얼토당토 해서 그냥 웃어 넘기기엔 뭔가 께름칙하다.

'우리 기저귀'라고? 생각하기도 싫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미래의 일이 될 것을 아는 , 그러나 믿고 싶지 않은 이 현실 앞에서 초로의 늙은이들은 초조해하고 있다.


코로나라는 듣도 보도 못 한 대역병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건강도 담보하지 못하는 이 시절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집콕하느라, 집밥 하느라 지겹다 지겹다 하면서도 일주일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2020년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만 싶은 마음뿐인데 침침한 요양원 이야기를 하려니 마음이 더 무거워지지만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 쉬운  '노인네'라는 이상한 대명사가 되지 않아도 되는 요양시설이 있다는 것 , 그것도 캐나다 한 복판에서  한국음식에다 한인 의료진이 있다는 것이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오아시스에 가지 않고 '집에서 끝~~~ 까지 살고 싶다'말을 듣고 흠칫 놀라는 자녀들이 있을까? 없을까?

 때가 되면 너도 나도 가야 할 곳, 그 이름은 요양원.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높은 힐도 신어 본 지난주.

커누를 타는 캐나디안 노인의 활력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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