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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Jan 26. 2021

글쟁이와 바느질 쟁이는 궁하다

동생과 나

'궁하다'라는 말은 궁상맞다와 궁핍하다의 중간쯤 되는 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 많이 썼던 이북식 단어인데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와, 바느질 아니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하는 동생을 보고 모친이 가끔 하신 말이다.

아이 때부터 인형 옷을 만들고 그림을 잘 그리던 동생에 비해서 나는 가정 시간의 숙제인 코바늘 뜨기로 만든 원형 꽃병 받침이 타원형으로 변해서 풀을 먹이고 다려서 원형 복구에 땀을 흘릴 정도로 곰손이었다. 그러나 반전은,  공부 잘하는 것이 권력이 되던 그 당시에 나는 공부만 잘했다. 동생은 공부보다는 미적인 감각이 뛰어나서 미대를 가고 싶어 했으나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부모님 등쌀에 고3이 되어서야 한 달 레슨을 받고 미대로 진학했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용서될 정도로 학력 만능 시대에 책 읽기를 좋아하다 보니 집중력과 암기력이 계발되었나 보다.

거의 활자 중독 수준으로 책을 다 보니 공부는 덤으로 잘했다. 인성이 나쁜 암기왕은 다 이유가 있다. 공부 외엔 손 하나 까딱도 못 하게 하고 다 해주고 떠 받드니 세상이 다 자기 발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내 경우도 맏딸로서 말도 떨어지기 전에 대령하는 모친 덕에 스포일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취미가 없는 동생에 비해서 우대 및 특혜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지금도 참을성이 없고 싫증을 빨리 내며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다.


나의 초등 생활기록부에 '온순하고 명랑하나 비사교적임'이라고 쓰인 것을 보면 변해도 한참 변한 지금의 나 자신에 놀랄 뿐이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닉네임을 'shygrace'라고 쓰는데 사람들이 들으면 '웃으면 안 되는데'하면서 괜히 킥킥 웃는다. 범생이 고등학교 시절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동생은 중학생이니 무슨 공감대가 있었겠는가.

나는 공사다망, people person인 관계로 친구들과 노느라고  이미 몸은 집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동생은 체력도 약해서 학교에서 쓰러지기 일쑤라서 항상 집에만 있었다. 바느질 신동이니 방 한구석의 싱거(singer) 미싱 앞에서 중학생이 항상 뭔가 꼼지락거리며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질색을 했던 엄마는 바느질 좋아하면 궁하게 산다며 싫어하셨다.

나는 엄마가 주문해서 보시던 일본 잡지인 '주부 노 생활'부터 세계 문학 전집을 항상 손에 쥐고 있는 데다가 성적도 잘 나오니 눈흘김이 덜하셨다. 그러나 글 쓰는 사람도 궁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혀를 차셨다.

동생은 집안에서 외동, 나는 집 밖에서 외동이나 다름없었다. 


김장 때가 되면 다음날 약속이 있다며 신부수업의 일환으로서 그 전날 다 절여 놓은 배추에 속을 넣으라는 엄명 때문에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자고 있는 식구들을 다 깨워서 몇 시간 만에 끝내고 풍채 바람을 휘날리고 나가버리곤 했다. 온돌방에 앉아서 김장 속을 넣는데 왜 그렇게 허리가 끊어지고 꼬리뼈가 아팠던지.

나는 그렇게 집 밖에서 24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활개를 치는 동안 집순이인 동생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을 고스란히 목격하면서 가정교육을 몸으로 체득했다.

부친이 많지는 않지만 사재를 출연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주었는데 동생도 어려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성적표를 확인하고 학비를 전달하는 형식적인 과정에서 반세기 전에 벌써 성적표를 고쳐온 학생이 있었다는 것을 동생은 보았다고. 아무리 옛날 분이라고 해도 이북에서 전쟁통에 맨 몸으로 피난 와서 자수성가하신 분이니 배짱과 의지력과 눈치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인정도 많으시고 정직한 분이시니 사정을 이야기하면 쾌히 선처하셨을 텐데.

친척 중에서도 '아'하면 벌써 '어'하고 아시는 분 앞에서 렁이 담 넘어가듯 거짓말을 하다가 혼 나는 장면, 관리인이 장부에 구멍을 낸 일추궁당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독학했다고 한다.


둘 다 결혼하고 애들을 키우느라 복닥거리다가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오자 IMF가 나면서 동생네도 독립이민으로 캐나다로 오고 일 년 후에 혼자되신 모친도 초청해서 모셔왔다.

외향적인 나와 내성적인 동생은 배우자는 자기와 반대인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에선 그럭저럭 살다가 이민이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서바이벌을 하려고 애를 동생의 남편은 남매를 다 결혼시키고 기침을 약간 했을 뿐 무척 건강하던 사람이 부정맥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폐암 진단을 받고 3개월 만에 이 땅을 떠났다.

산을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밴쿠버에 20년을 살면서 록키 산맥도 못  정도로 바쁘게  살아내느라고 절치부심을 하다가.

항암이 끝나면 병원 복도의 징을 치면서 축하해 준다는 말이 자기의 일인 줄 굳게 믿고 치료가 끝나면 부부가 한국으로 여행 간다고 들떠 있었다던데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모진 이민 생활 끝에 얻는 건 병뿐이라더니.

아니다. 나도 한국에 있던 자산을 야금야금 빼서 다 먹어버리고 IMF까지 쳐서 수입을 하던 남편의 사업도 엎었으니 이민생활이 혹독한 건 사실이다. 돈과는 멀고 자연과는 가깝다는 캐나다에서 돈이 없으니 돈걱정을 안 해서 마음이 편하다는 역설에 허허 웃고 산다.


 제부가 그렇게 허망하게 가기 일 년 전에 동생네는 밴쿠버에서 이미 캐나다 동부로 이사를 해 버렸다. 아들과 딸이 있는 곳으로.

그래서 남편이 없이 맞는 동생의 첫 번째 생일을 축하 겸 위로 공연을 주려고 동부로 날아갔다.

여기저기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부모님들이 하셨던 리액션들을 생각해 내고 둘이 낄낄거리며 추억했다.

어릴 때에는 천지차이가 나는 것 같던 관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중 늙은이 둘만 남았네.


어릴 때부터 동생은 언니라면 우상시하면서

언니가 최고라는 생각에 범접하지 못할 존재였다나. 언니가 하는 것은 무조건 좋아 보이고 따라 하고 싶었다고.

그래도 제가 애지중지하던 팔찌를 어느 날  언니가 후딱 차고 나갔을 때 말은 못 하고 얼마나 얄미웠을까?

 동생들이 겪는 언니의 무심한 횡포에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동생으로 태어난 것에 비애를 느꼈으리라.


동생이 나를 생각하고 따르는 만큼 나는 그렇게 해 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드디어 갚을 기회가 왔다.

캐나다에서는 65세의 연금 생활자가 되기 전에 배우자가 사망하면 유족 수당이라는 것을 거의 연금 수준을 준다.

동생네 온 가족이 그런 제도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망연자실 있다가 알려 주었더니 신청을 해서 잘 받고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다.


 '결벽증 새언니'에 나오는 사람처럼 부엌의 실리콘에 앉은 물때를 지우는 대신에 실리콘을 새로 쏜다는 것도 기가 찬데.

동생은 집수리를 하다가  업자가 바빠서 미처 못 한 드라이 월을  붙이지를 않나, 부엌 벽의 backsplash의 타일 작업도 손수 하느라고 타일 자르는 기계까지 갖고 있다. 심지어 빗물 홈통까지 수평을 맞춰 잘라서 수리를 하는 금손이다. 가구 조립으로 치면 IKEA 출장 서비스 나가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추었다.

매사에 '처삼촌 벌초하듯이' 대충대충 하는 나와는 달리 꼼꼼하고 야무진 손끝으로 언니가 온다 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을 단단하게 말아서 곱게 썰어놓곤 했다.

물건도  오래 쓰고 정갈하게 관리하며 하나를 사도 고급으로 산다. 반면에 나는 물건을 험하게 쓰고 그런 걸 알아서 아예 저렴이로 사서 고장 나면 안 고치고 버리고 새 것을 사는 주의이다.

패션 취향도 달라서 동생은 우아한 디자인을 좋아해서 앙드레 김 스타일을 좋아했고 난 청바지에 캐주얼 좋아해서 남의 결혼식에 그렇게 갔다가 눈총을 받은 적도 있었다.

체형도 딴판이라 동생은 키가 크고 군살 없이 늘씬하며 피부는 까무잡잡한데 비해 나는 보통 키에 피부가 희고 통통한 타입이다.

이렇게 다른 성향을 가진, 절대 자매로 안 보일 것 같은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은 둘 다 남에게 퍼 주기를 좋아하고 전화 목소리가 똑같다는 것뿐이다.


나는 진정한 글쟁이도 못 되면서 책만 읽느라고  깡지근하다(게을러서 꼼짝하기 싫어하는)는 소리만 듣고 실속도 없다. 동생은 바느질은 애들 소꿉장난이고 집 안 밖을 아우르는 완벽한 살림 솜씨를 가졌다.

그래도 둘 다 궁 하지는 않고 밥은 먹고 사네.


말이 없고 내성적이면서도 속에 흥이 많으나

시집살이와 이민생활에 항상 '줄에 앉은 새'처럼 불안에 떨면서 아이들 잘 키우려는 책임감으로 살았던 동생.

언니 따라 이민을 와서 내가 도움을 주었던 것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못 해준 것만 생각이 나네.


명랑하지만 꾹꾹 누르고 살던 동생도 7년 전에 암투병을 했었다. 참는 자에게 복도 오고 병도 오나보다.

표현을 잘 안 하고 겉으로 웃기만 하고 참는 사람들이 병이 많은 것을 보았다. 

사람은 다 똑같다. 가끔씩 김을 빼 주어야지 압력만 가하면 결국 폭발을 하던지, 속에서 썩던지.


세상의 모든 동생들이여, 많이 아프지 말고 먼저 가지 말고

온 순서대로 가자꾸나.

 동생이 천갈이 해준 우리 집 암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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