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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Aug 23. 2021

결벽증 그랜파

선 넘네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다니엘이 씨앗을 심은  화분을 집에 안 갖고 갔는데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둘째 손자인 다니엘이 초등 2학년 때  학교에서 각자의 화분에 강낭 콩씨를 심어서 집에 갖고 가서 자라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다음 날 선생님이 다시 전화를 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할아버지 차가 너무 깨끗해서 흙이 든 화분을 차에 가져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가져갔다고 말했다나.

그 말을 듣고 어른들은 순진한 귀여움에 박장대소를 했지만 어린아이가 그런 이유로 학교 과제물을 안 가져왔다니 좀 뜨끔했다.


일주일에 두 번 세 아이들의 등 하교를 시켜 주는데 학교 앞 파킹랏이 부족해서 아이들과  늘 만나는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서 20분 먼저 갔었다. 킨더가든 다니는 막내는 보호자가 교실 문 앞에서 기다려서 데려가야 하니 내가 데리러 갈 동안 남편은 차 안을 정리하고 신발 깔개를 털고 차를 타면 바로  입에 넣어줄 캔디를 챙기는 등 아이들을 맞을 치밀한(?) 준비를 하곤 했다.


비가 많이 오는 밴쿠버의 날씨에는 아이들이 스스로 장화를 차 밖에서 벗고 타월 깔린 바닥에 놓고 양반다리를 하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아이들이 집안으로 들어가면 남편은 우산을 쓰고라도 애들 장화에서 떨어진 흙이 묻은 타월을 밖에다 탁탁 털어서 비닐봉지에 담고 트렁크에 예비해 둔 새 타월을 깔았다.


나야 워낙 덜렁이라 어렸을 때도 집에 와서 발을 벗고 들어갈 때 신발 한 짝은 입구에 다른 한 짝은 현관 밖에 떨어져 있으니 말해 뭐하랴. 그러므로 차 관리는 처음부터 남편 몫이었다.


옛말에 부부는 저울에 달면 똑같다고 했다.

다르고 틀리다고 아무리 으르렁대도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니 참고 살라는 뜻이었을게다.

남편은 쓸고 닦고는 잘하는데 정리를 전혀 못 한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

그렇다고 정신없이 어지르는 것이 아니고 금방 찾아 쓸 수 있게 서랍 안에도 차곡차 곡이 없이 단면으로 쫘악 펼쳐 놓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비효율적인 공간 활용인지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나는 손목 터널 증후군이 생길 정도로 쓸고 닦고 하는 타입이 전혀 아니다. 그래서인지 오십견도 없이 지나갔다는. 그 대신 정리 정돈을 잘한다. 비록 책상 밑에 약간의 먼지는 있을지언정 척 보면 분위기가 깔끔하고 청소까지 잘 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딴 사람들 말이.

그러니까 우리 부부가 힘을 합치면 집을 말끔,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랜파의 비효율적인 공간  활용과           치매예방을 위한 열공 중


반대로 아들 셋을 키우는 큰 애네 집을 가보면 이사 가기 직전의 집안 분위기이다.

서재 라야  비집고 들어가야만 가까스로 책상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배경은 이삿짐 그 자체이다. 여름에 다녀온 캠핑 장비가 그대로 산처럼 쌓여있질 않나. 하키, 축구용품에 발 디딜 틈이 없다. 부엌은 다 갈아엎고 수리한 그 일주일 동안만 깨끗하고 그다음부터는  탁위 한 가득, 냉장고 앞면엔 웬 사진들이 가득인지. 세 아이들 머리에 담요를  쓴, 한 달째 사진부터 지금까지의 사진들, 학교 스케줄까지 한 치의 여백도 없이 가득이다.

더 말하려면 끝도 없고 일단 아이들 학교에 간 다음 아들네 집에 오면 화장실 청소부터 한다. 하루 종일 나도 써야 하므로.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치우려면 디쉬 워셔에서 다 세척된 식기들을 꺼내서 제자리에 넣어야 된다. 공장처럼 하루에 두세 번 돌아가는 디쉬 워셔와 세탁기. 건조기에서 꺼낸 손톱만 한 양말부터 산더미만 한  옷가지들을 개려면 철인 삼종 경기를 뛰기 위한 심호흡을 해야 했다.

친구들이 와서 슬립오버하는 방. 시끄러움을 피해서 외딴 곳에서 쉬고 있는 강아지


어수선한 집에선 흙이 뚝뚝 떨어지는 신발을 신던지 물이 줄줄 새는 화분을 가져 오든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할아버지 차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깨끗함 때문에 아이들이 감히 지저분하게 하지 못하는 무언의 규칙이 생겼나 보다. 어떤 면에서 자연적이지 못하고 너무나 인위적인 환경을 만든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의 과제물도 못 가져오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으니.


나와 내 친구들이 20대에 아이들도 없는  새색시(새댁)이었을 때  요즘같이 스타벅스나 베이커리 카페가 없을 때니 주로

음식점에서 만났다. 아이들을 낳고는 집에서 만났지만. 식사를 고르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수다를 떠는데 친구가 쿡쿡 찌르며 옆을 보라고 눈짓을 했다. 건너편 테이블의 남자들 세 명이 앉아서 메뉴판을  보는데 잘 안 보이는지 메뉴판을 멀리 놓고 눈을 찡그리며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들은 수다 중의 웃음을 가장해서 킥킥대고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40대 중반이나 후반 정도의 청 장년들이었는데 갓 결혼은 했지만 20대의 새파란 새댁들 눈에는 완전 할아버지 직전의 노안을 장착한 한참 노인네로만 보였던 것이다. 돋보기를 쓴 파파 노인을 상상하면서 웃었던 것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아무리 깔끔을 떨어도  노년은 찾아오고 음식을 흘리며 이가 성글어지는 서글픔을 어찌 그 새댁들이 알았을까?


세월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흐른다지만  풋풋했다가 완숙되어가는 것 까지는 봐주겠는데 나무 등걸처럼 물기가 서서히 말라가면서 푸석거릴 것이라는 것은 미처 몰랐다.

권력에 취하든 물질에 취한 든, 이상하게 인간이 만든 프레임에 갇히면 그것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권력 끝까지 유지하고 돈도 지금처럼 왕왕 벌릴 것이라는 오만한 착각 속에 남몰래 흡족한 미소를 흘리지만 글쎄.

좀 살아보면 우리가 자신 있게 '이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든다. 특히 늙음과 젊음의 함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그 누구도 해답을 낼 수 없다.  태어나는 순간 부터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생의 행로이므로.


노안을 비웃고 낄낄거리던,  젊고 싱싱해했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비로소 노안이 되어 찡그리지 않으면 세상조차 바로 볼 수 없는 비뚤어진 얼굴이 되어 버렸네.

무리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야만 성공의 길로 갈 수 있다고 교육을 받아온 세대가 지나가고 앞으로 올 세상은 예측을 불허한다. 이제는 .com이 지고 .ai가 이미 나온 세상을 어떤 얼굴로 바라보게 될까나.


결벽증이 성격적인 면도 있겠으나  불합리한 이 세상 속에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면서 생긴 일종의 후유증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강박증의 일종인 의심도 해본다.

마치 자가면역체계 질환처럼 자신을 공격하별없는 병처럼.


그런데 이제는 여행도 싫어지는 것이 남이 쓰던 호텔의 침대도  께름직하고 비행기 실내도 탁하고 숨쉬기 힘들것 같아서.

결국 선을 넘은 결벽증이 드디어  중증으로 발전되어 가는 사인인가?


 코로나 때  우리 부부는 손 씻기가 너무 즐거운데(?) 손자들은 꼭 씻으라고 해야만 씻는 등 괴로워하더라.

나이 들면 높이가 높은 컵의 물은 쏟기가 쉬워서 낮은 컵을 사용. 물도 벌컥벌컥 못 마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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