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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sbook Apr 04. 2023

살기 좋은 세상에 여성은 없는 걸까

한국여성의전화 분노의 게이지 자원활동 후기

어떤 폭력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분노의 게이지’ 활동을 시작했다. 25명의 자원활동가와 함께 2022년 남성에 의한 여성 피해 및 살인 사건들을 취합했다. 기사 헤드라인만 봤을 뿐인데 허무와 분노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기사를 읽으면서 남성 가해자들은 이별 통보를 이유로, 다른 남자와 연락했다는 이유로, 술상을 차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냥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내 의견을 무시했다는 이유 등, 납득할 수 없는 갖가지 이유들을 범죄 동기로 밝혔다.


2022년 데이트폭력 등으로 살해당한 여성 피해자 수는 86명. 살인미수를 포함하면 311명. 하루로 환산하면 1.17일마다 1명씩 여성들은 남성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위험에 처했다. 연령층도 10대부터 70대까지 여성은 모든 생애 주기를 거치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출근하다가, 퇴근하다가, 집 앞에서, 집 안에서, 골목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남성들에게 두들겨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고, 목이 졸려 죽고, 약을 먹고 죽었다. 여성들의 삶 곳곳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잠시 ‘분노의 게이지’ 활동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는 남중-남고-공대-군대라는 남성 중심 사회를 거치며 또래들로부터 괴롭힘과 무시를 겪었다. 그때 내가 느낀 남성 중심 사회에는 여성들을 향한 혐오와 무시가 깔려있었고 여성들을 이해하기보다 정복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남성의 위계에 의한 폭력은 나날이 공고해지고 여성들에게 혐오와 편견의 시선을 지닌 채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나는 그들처럼 섞이기 싫으면서도 조직 내 무시받지 않으려고 인정욕구를 갈구해야 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갈등하고 괴로워했던 시절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겨난 성별에 따른 위계로 생긴 폭력은 벗어던져야 할 것임을 알았다. 활동하는 동안,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아니어서 여성의 삶 전반과 깊이를 알지는 못하는 한계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주입받은 남성성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는 ‘이런다고 사회가 달라질까, 혹시 뭐가 되는 것처럼 구는 건 아닌가.’라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아직도 남성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활동을 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세상은 살기 좋은(good to live) 세상이 아닌 살기(threatening mood) 좋은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여성을 향한 남성들의 살기 가득한 폭력으로부터 산다는 건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진대 만일 생의 전체가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말할 자유가 있을까.


 

3월 4일 토요일.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린 제38회 한국여성대회 한국여성의전화 부스에서 최말자 선생님과 활동가분들을 만났다. 최말자 선생님은 56년 전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상황을 모면했지만, 정당방위 인정을 받지 못해 가해자로 유죄판결을 받은 당사자이기도 하셨다. 현재 재항고 후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라는 한 활동가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마음이 맺혔다.


부스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푸른색 장미 한 송이를 건네주시던 최말자 선생님의 모습을 보다가 부스를 지키는 활동가 선생님께 다가가 여쭈어보았다. “활동이 힘들지 않으신가요”라는 말에 한 활동가 선생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흰 괜찮아요. 주변 활동가분들과 피해자분들이 건네주시는 위로에 견뎌요.”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사막에 핀 장미처럼 환경은 척박하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부스에서 느낄 수 있었다.


범죄 앞에서 무기력하게 있을 수 없다면 잘못을 잘못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겠다. 홀로 외치는 목소리는 무척 미미할지라도 작은 목소리가 층층이 쌓일수록 커다란 에코(echo)가 되어 울려 퍼지듯, 작음의 지속을 믿으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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