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 공동체의 이야기를 들으며
562p.우리의 연장자들은 제의가 '기억하기를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말 한다. 베풂의 춤에서는 대지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해야 하는 선물임을 명심하라. 이 사실을 잊으면 우리가 추어 야 할 춤은 애도의 춤일 것이다. 우리는 북극곰의 멸종을, 두루미의 침묵을, 강의 죽음을, 눈의 기억을 애도해야 할 것이다. -로빈 월 키머러,<향모를 땋으며>
의정부와 서울 북동쪽을 둘러싼 수락산 공동체 사람들(이하 수락 공동체)의 이야기에선 뿌리 깊은 돌봄의 가치가 심겨있었다. 기후생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 중 탄소를 땅에 모아두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상쇄하는 저장 농법인 퍼머컬처(Permanent + agriculture 합성어)를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든든하면서 한편으론 식물의 뿌리처럼 단단한 이들의 이야기에 나는 노동과 돌봄의 의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 비판과 대안적 노동 모색’ 을 주제로 강연을 한 수락 공동체 활동가 도토리(유선) 님에게서 착취의 의미를 생각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긴밀히 얽힌 사회는 인간과 자연(자원)의 착취-피착취의 관계가 공고하다.
인간이 노동으로 물질적 보상을 얻더라도 부품처럼 취급되다 대체되어 버리는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엇이든 쉽게 얻고 소비되는 관계에서 과정은 깎여나가고 이윤이 되는 것만 노동이고 그렇지 않은 건 낭비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질 수밖에 없다. 돌봄도 그렇게 깎여나가버렸다.
내가 속한 공덕동 텃밭 규모는 수락 공동체에 비해 작고 아담해서 명함을 내밀기 부끄럽다만, 모종을 심고 식물을 키우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식물이 자라 수확하기까지 함수처럼 예스/노로 답이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돌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일을 하면 몇 푼을 받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며 시간 대비 노동 효율성을 따지는 나의 모습은 자본주의에 찌든 노동자 그 자체였고 돌봄이 단지 외식 줄이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요리하며 건강 관리라든지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즉, 내 앞가림만 잘하는 자기 관리가 돌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돌봄은 자기 관리가 아니며 훨씬 넓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와 자연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라고 여기는 것. 그것이 돌봄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소비하는 과일, 곡식 등 수확물이 식탁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릴수록 아울러 그 수확물이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면 할수록 나와 자연은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았다.
”텃밭의 작물을 먹어치워 밭을 엉망으로 만든 멧돼지에 분개하다가도 추운 겨울 도랑에 빠져 죽은 멧돼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관점의 전환으로 이어져야만 했다.“
활동가 해견님의 말을 듣다가 돌봄은 굉장히 복잡해 보여도 실은 단순하며, 단순해 보여도 복잡한 명제의 역과 이로 다가왔다. 돌봄이란 뿌리는 삶과 긴밀하게 엮여있다. 땅에 자란 수확물이 흙, 식물 그리고 나무들의 뿌리와 긴밀히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싹 틔우듯, 돌봄에도 자본주의, 가부장제, 노동의 뿌리와 긴밀히 얽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념 하나하나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있지만 어느 것 하나 끊어내기 쉽지 않다.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옳은 일을 해나가는 힘일 터.
내가 생각하는 옳은 일을 떠올려보았다. 마진과 이윤을 따르지 않고 적게 쓰고 적게 벌고 적게 일하고 스스로 텃밭을 일구어보는 일. 모든 걸 상품화되어 소비자로 전락하고 착취 피착취의 굴레를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금씩 나와 관계 맺는 주변을 떠올려보는 것부터 출발해 보는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