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업 일치'를 꿈꾸던 직장인의 현실 직시 에세이
내가 전 직장을 어떤 마음으로 퇴사했는지 잘 아는 친구들은 오랜만에 나를 보면 다들 비슷한 질문을 한다.
“옮긴 회사는 괜찮아?"
스스로를 내색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이렇게 걱정을 끼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징징거렸나 싶은 마음에 부끄러움도 슬쩍 밀려든다. 괜찮냐는 한 마디에 얼마나 복합스러운 걱정이 묻어있는지를 잘 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좋아. 만족스러워."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에 당분간은 이직 생각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다음으로는 늘 비슷한 물음이 두 번째로 온다.
"재미는 있어?”
재미.
“재미는 그냥 뭐… 너는 있냐?”
"그럴 리가. 그래도 넌 글 쓰는 거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일 하면 재밌지 않아?”
스타트업의 에디터로 자리를 옮긴 지 1년 6개월째. 함께 하는 팀원들도 정말 무해한 사람들이라 즐겁고, 쉽진 않지만 업무 시간을 꽉꽉 채워 잘만 쓰면 칼퇴도 가능하다. 업무 난이도가 너무 낮아서 오히려 힘들었던 전 직장과 달리 여기선 종종 어려운 일에도 부딪히지만 스스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얻는 결과가 명확한 곳이기도 해서 좋다.
전체적으로 후하게 봐주자면, 재미가 없는 편 보다는 있는 편에 가깝다. 그러나 그 재미들은 사람에서 오고, 일하는 방식에서 오는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처음엔 나 조차도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첫 직장, 두 번째 직장과 달리 만족스러운데. 글 쓰는 일을 좋아하고 집에 가면 책 한 페이지 읽기 싫어질 정도로 하루 종일 글자와 씨름을 하는데 왜 나는 즐겁지가 않은 거지? 내가 여태 내 적성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글 쓰는 것을 천직이라고 여겼던 시간이 무려 30년(?)인데. 아뿔싸, 나는 적성이라는 것이 없는 인간이었구나.
뒤늦게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한 두어 달 정도는 그 무섭다는 인생 노잼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이 때는 꽃꽂이, 필라테스, 롱보드 타기, 피아노 치기. 그럴싸해 보이는 취미를 다 섭렵했었다. 이제라도 늦은 적성을 찾아보려고.
당시에 뭘 단단히 착각했었는지 지금은 어렴풋이 답을 안다. 어쩌다 보니 7년째 글을 쓰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며 깨달은 게 있다. '회사'에서 내 글을 쓴다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기자일 때는 글에 내 생각이 들어가면 그건 아예 틀린 글이 되어 버렸고, 바이럴 마케터일 때는 무조건 콘텐츠의 노출 수만 중요했다. 에디터로 일하는 지금은 성과가 잘 나올 수 있는 글을 쓴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글쟁이인 동시에 회사에서 회사에 보탬이 되는 글을 쓰는 대가로 급여를 받는 회사원이기 때문이다.
글쟁이들이 재미를 느끼는 순간은 키보드를 쉴 새 없이 두드리는 그런 단순한 찰나가 아니다.
커다란 덩어리의 생각과 감정에서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부분만 한 움큼 떼내어 깨끗하게 씻고 말리고 뾰족하게 다듬어 마음 밖으로 꺼내놓는 과정. 나는 이 과정 전체를 글쓰기라 부르고 몇 시간이고 망부석처럼 앉아 백지를 기어코 빼곡히 메워 냈을 때 행복감을 가득 느낀다.
그렇지만 어떤 조직에 속해 글쟁이로서의 밥벌이를 하다 보면 이런 과정들은 싸그리 무시된다. 딱 지금 타이밍에 글 한편이 뚝딱 나와야 하는 일이 잦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글을 빠르게, 목적에 맞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하나의 글이 탄생하는 것은 같지만 목적과 과정이 엄연히 다르다. 아예 완전히 다른 작업이 되어 버린다. 이게 바로 특히 글쟁이가 덕업 일치를 이루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다.
요즘은 덕업 일치 생각일랑 접어두고 그냥 따로 시간을 내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글을 쓴다. 브런치에 늘어놓는 글들도 온전히 나의 재미를 찾기 위해 쓰는 글들이다. 요구되는 목적 없이 활자와 활자 사이를 자유롭게 날 때 나는 비로소 즐겁다.
덕업 일치가 미덕처럼 불리는 시대에, 업에서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불안해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는 말았으면 한다. 억지로 덕과 업을 이어보려 하지 말고 재미는 가볍게 다른 곳에서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