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오늘은 완벽한 날이어야 했다. 2년을 내리 떨어진 공모전에서 3년 만에 내 글이 뽑혔고 드디어 출판사와 계약을 하러 온 날. 그러니까 내가 정식으로 등단이라는 것을 하게 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가 왜 또 내 눈앞에 있을까. 내 인생이 벤츠로 갈아타는 오늘 너 같은 똥차가 깜빡이도 없이 또 치고 들어오다니.
서른 살쯤 먹으면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진리들이 있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마지막’은 그게 마지막 인지도 모른 채로 지나가 버린다는 것. 내가 그걸 알아차렸을 땐 고개를 아무리 쭉 빼봤자 마지막이란 놈은 뒤통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버린 후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자식과의 마지막도 그랬다.
8년을 만나며 우리는 열 번을 헤어졌다.
로코 같은 이별도, 신파극 같은 헤어짐도, 국가의 부름으로 인한 생이별도 우리는 전부 해봤다. 세상에 이별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행위는 다 해본 게 우리 사이, 아니 나와 이 인간이었다.
나는 열 번의 이별 후엔 열한 번째 이별도, 열두 번째 이별도 있겠지라고 여지없이 믿었다. 헤어지자마자 연락처를 차단하고 네 손길이 닿은 물건들을 싹 다 내다 버려도 어느새 자석처럼 다시 붙어버리던 게 우리 사이였으니까. 그러나 열 번째 이별은 진짜 이별이 되어 버렸다. 그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 이별 통보는 더 근사한 곳에서 할걸 이라는 후회도 많이 했다. 돼지 껍데기와 순댓국 냄새가 진동하는 먹자골목 한복판이 아니라.
다시 마주한 그는 나에게 신인상을 주고 내 글을 책으로 내준다는 출판사의 편집장이다.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티스푼으로 한참을 젓던 그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냐? 여전히 글 쓰네.”
“어. 너도 잘 지냈지? 여전히 옷은 못 입네."
“말 밉게 하는 것도 여전하고. 글 쓰는 거 반만큼이라도 예쁘게 말해봐라 좀.”
“미안. 미운 사람 보면 말도 저절로 밉게 나오는 투명한 사람이라 내가."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 것도 여전하고. 하나도 안 변했구나.”
정작 별 뜻 없는 말도 비아냥 거리는 투로 뱉는 본인의 말버릇이야 말로 여전함 그 자체라는 것을 그는 모르는 듯하다.
의미 없는 말들이 허공에 튄다. 20대에 이 녀석과 지겹도록 했던 입씨름을 다시 재연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때론 감정에 잡아먹혀 쳐다보는 시선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악다구니를 쓰며 싸웠고, 때론 논리 정연하게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싸웠다. 사귀면서 그런 식의 말싸움을 한 시간만 합쳐도 연애 기간의 절반은 되는 듯싶다. 어휴, 정말 구질구질했구나 우리.
그는 다 식다 못해 차가워진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큰맘 먹은 듯 입을 뗐다.
“다 옛날 일인데 괜히 서로 불편해하지 말자고. 일로 만났으니까 일해. 등단 축하하고."
“넌 내가 불편해? 난 너 하나도 안 불편한데. 오히려 반가워.”
솔직히 말하자면 상상해본 적은 있다. 혹시 우연히라도 마주친다면 어떤 장소일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는 체는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몇 번 생각은 해봤다.
그러나 막상 다시 만나보니 알겠다. 내가 그 시절을 아주 아련한 색채로 미화하고 있었다는 걸.
양심고백을 할 시간이다.
“사실은 나 그 소설 에필로그에 예전에 네가 나한테 했던 말 몇 개를 대사로 썼거든. 근데 딱 널 만나니까 혹시나 그 대사들을 네가 알아봤을까 봐, 그게 쪽팔려서. 덜컥 그거부터 걱정되더라고.”
무슨 얘기인지 잠깐 사태 파악을 하던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릎을 탁 치며 웃는다.
“아, 어쩐지 글이 기시감이 있더라고!”
“아주 둔하지는 않은가 보네?”
마주 앉은 이래로 처음 보이는 미소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끈으로 꽉 조여놓은 것 같던 공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다. 하긴 8년을 매일 같이 봤으니. 그도 풀어진 공기를 느낀 건지 내내 정자세로 앉아 있던 몸을 풀어 소파에 편안히 등을 기댄다.
그때 우리는 왜 그랬을까. 뭐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다가도, 미워하고, 싸우고, 실망하기를 반복했을까. 서로에게 어떤 모습을 바랐던 걸까.
그는 답을 알고 있는지 물으려다 그냥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삼켜버리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봄바람에 몸을 맡긴 잎새들이 푸르다.
여기가 우리들의 에필로그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