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

비(飛)

by 구시안

땅의 녹슨 수수께끼 위로

투명한 요정들이 떨어진다.


삶으로 벌린 나의 두 팔 사이로

흩어져 소매를 적신다.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녹아내린 유리처럼 거리 위를 기어 다니며, 나의 발목을 붙잡고 위로 기어오른다. 나는 젖는다기보다, 어떤 투명한 존재로 다시 주조된다.


나는 나를 잃어버린다. 아니, 애초에 나는 하나가 아니었다. 내 안에는 파란 혀를 가진 아이가 있고, 철 냄새를 맡는 늙은 자가 있으며, 이름 없는 짐승이 빛을 핥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본다.


가로등은 노란 비명을 지르고, 그 소리는 내 피부 위에 꽃처럼 번진다. 나는 그 꽃을 뜯어먹는다. 맛은 오래된 시간이다. 썩어가는 기억의 단맛.


거리는 뒤집힌다. 위와 아래가 교환되고, 신발 속으로 하늘이 스며든다. 나는 걸을 때마다 별을 밟는다. 부서진 빛이 발뒤꿈치에 박힌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지들이 나를 생각한다. 붉은 강이 내 안을 흐르고, 검은 태양이 내 눈 속에서 떠오른다. 나는 그 태양을 바라보다가 타버린다. 그러나 고통은 없다. 고통조차 색채로 분해되어 공기 중에 흩어진다.


나는 지나가는 모든 것,

부서지는 모든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것의 잔해다.

비는 계속되고, 세계는 점점 더 정확하게 틀려진다.


무한의 리듬에 맞춰

모든 것은 비워지고

또다시

채워진다.


비가 내리지 않던 사막에

그림을 그리는

자기 앞을 보기 위한

고독한 한 남자처럼

아직은

빗장 걸린 여름은 오지 않고

겨울의 눈으로 잘 만들어진

침대조차 준비되지 않았다.


두 눈처럼

열린 손을 잡고 앉아

봄비의 환영의 우유를

바라본다.


봄에 흠뻑 젖은 연인들이 뛰어가고

푸른 불꽃에 의해 갈라진

거리의 나무들은 풍성한

풀잎들을 갖게 됐다.


풍성한 포도 넝쿨처럼

주렁주렁 열린 생각들의 밤은

아직 잠들지 않는다.


바다의 포말들을 모아

담근 욕조 안에

모든 세포가 녹아내린다.


내 손의 미덕 때문에

내 입술의 축복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갔던

행복한 단어들이

수채구멍으로 빠져나간다.


사라져 버린 빛

되돌아오는 빛의 교차에

밤과 낮은

나를 웃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것이

때가 되면 내리는 비에

꽃 피고 익어간다.


내 삶의 건초 위에는

여전히 소금이 가득하다.


하루 지나면

또 하루

하룻밤이 지나면

여전한 나.

우리.


육체를 마주하고

대지를 마주하고

어디에나 태어나는

우리에겐 한계가 없어 보인다.


사람의 유일한

기억과 희망은

신비로움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다만

내일과 오늘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


바람 없는 숲 속에서

평화로운 풀밭 속에서

멀리 잃어버린 하늘과 연결된

바다를 향해 걷는 시간.

밤이 오면

나는 어떤 석화된

사막 속에서 잠자도 있던

고독한 사람을 깨워

낮의 혼란과 밤의 질서 속에서

동시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삶을 책임지고 있다고

나는 오늘을 책임지고 있다고

그리고 내일도

한계와 넓이 위에서

머리에 타오르는 분화구에서

피어오르는 불 위에서

연기 위에서

이성 위에서

광기 위에서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지만

죽음보다 더 비현실적인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별들은 내 눈 속에 있고

여전히 별이 된 이들이 남긴

신비로움을 넣으며

넉넉한 땅에

나 자신의 육체와 마음 하나

눕힐 밤을 지새울 공간에서

알맞게도록

욕심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땅속에 잇는 암흑 속에 있는 물과

밤으로부터 깊은 밤으로부터

당신을 차지했던 땅에 대해 물을 것이다.

투명한 모래 속은

그 안의 삶은 어떠하냐고.


신기루 쪽으로

사라진 별들을

바라보는 당신의 밤은 어떠냐고.


나는 꺼지지 않는 빛 위에서

멈추어 있고

당신은 그 태양을 볼 수 없을 텐데

삼켜진 갈증의 먼지와

삼켜진 빛이

당신에게는 어떠한 색채의 회환을 부르냐고.


나는 끝내 하나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나를 통과해 흐르는 모든 것의 날씨로 남아,

아직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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