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길에서 찾았던 비극 속의 희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허망함. 삶은 이미 다 끝나버려 모든 것이 유령처럼 느껴졌다.
여행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갈 때도 있지만, 무엇인가를 버리려 갈 때도 있다. 어두워지는 회색빛 하늘은 그렇게 물들었고, 산양이 흔들던 방울소리 그 소리는 천국으로 가는 신호를 주고 있었다. 시간의 벽을 넘어 들어가는 철로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천편일률적인 사람에 대해 한탄하거나 준엄하게 꾸짖는 시각을 바라본다. 실존주의라는 허무하고 부조리한 세계 속에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감정적인 정보들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보았다. 밤에 밑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아름다운 헛수고가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드는 순간. 녹슨 철선들은 어쩌면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을 아우슈비츠의 모습은 그러했다. 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처참한 비극의 숨소리였다.
12시간의 노동. 그 끝에는 만인들로 가득 찬 지하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지친 표정을 하고 그렇게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행렬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지독하게도 편안하지 못한 상태로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의 호흡을 느끼면서 삼십여 분 가량을 회기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한다. 지하철의 규칙적인 소리가 마치 사람들에 심장의 심박수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철조망. 혹여 전류가 통할지도 모르는 갑갑한 일과 속에 지쳐 쓰러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노예. 희미한 유일한 기억처럼 가혹한 채찍질, 길고 긴 죽음의 항해, 족쇄에 묶인 발과 손, 끝없이 펼쳐진 목화 농장과 살갗이 타들어갈 만큼 뜨거운 태양 아래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반복적인 일상 속에 지쳐가는 것은 정신과 육체라는 것에 탈출은 금기였고 저항은 곧 처형이 되는 노예라는 단어가 떠오를 뿐이었다. 떠날 때가 온 것인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물들며 지하철의 나는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열차 안에 사람들 틈에 끼어 어느 줄로 선별될 줄 모르는 포로가 되어 아무런 표정 없는 상태로 그렇게 도착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보고 싶은 충동은 늘 순간적이었다. 여행길에 들리게 된 아우슈비츠가 떠올랐다. 죽음이 배송되는 시간. 오케스트라의 처절한 연주처럼 절규만이 가득한 곳처럼 느껴졌다. 아우슈비츠는 포병 막사를 개조하여 만든 제1수용소였다. 비르케나우는 제2 수용소 말 그대로 학살, 살인공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모노비츠는 제3 수용소로 죽음의 노동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이름 모를 수용소들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십삼만 평의 거대한 죽음의 공간. 인류의 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 거대한 학살을 위한 공장. 이곳을 설명해 주던 가이드는 비르케나우의 뜻이 자작나무 숲이라고 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큰 수용소였다.
나치 SS 군인들이 기록해 둔 사진들을 우연히 여행길에 보게 되고 들린 곳이었다. 탐미적인 소설에 나오는 공간이 아닌 역사 속에 처절한 인간의 바닥이 어디까지인지를 보게 되는 그 잔인함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곳. 매일 삼천사백 명의 시체를 태웠던 소각장. 집단 교수대는 그들이 걷는 길 곳곳에 있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말이다. 새로운 수용자가 오면 기존의 수용자는 그렇게 죽어갔다. 기차가 도착하면 선별작업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나뉘었다. 노인, 아이, 병든 사람, 임산부, 장애인을 포함하여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은 가스실로 옮겨졌다. 유대인만이 학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범죄자들까지 학살의 대상이었다.
정치범은 빨간색. 일반 범죄자는 초록색, 반사회적 인물들은 검정으로, 동성애자들은 분홍색의 삼각형이 새겨졌다. 지클론 한 통으로 사백 명을 죽일 수 있었다. 죽음의 가스. 여자들의 머리카락으로 짠 모포. 산업원료로 쓰였던 수많은 머리카락들을 보았다. 2톤이 넘는다는 머리카락 산더미를 보았다. 그것은 잔혹한 흔적을 남겨 사람들에게 전시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신고 있던 신발. 옷. 가방은 산처럼 쌓여있었다. 소들의 여물통을 연상케 하는 세면장, 차가운 바닥 위 깔려 있는 짚들, 총살, 가스, 주사는 모두 학살에 사용되었다. 인간 존엄성 부정이 가져올 수많은 위협과 비극에 대한 경고. 절멸의 수용소. 인간의 바닥. 절망. 슬픔. 절규. 아픔.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가 그림이 되어 남아 있는 곳을 떠올린다. 이 드넓은 곳을 채워고 있었을 사람들. 너무 방대하여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곳을, 가이드의 목소리가 설명을 더하는 곳을 바라보며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던 그곳의 하늘을 기억한다. 오시비엥침. 폴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부다페스트의 정신없던 버스정류장. 크라쿠프까지의 긴 여정. 국경을 넘을 때마다 하얗게 수놓아 있는 풍경. 그리고 정적의 시간이 기억난다.
폴란드의 트램에 올랐을 때처럼, 느껴지는 퇴근길에 나는 아우슈비츠를 떠올리고 있었다. 적막한 거리, 그들이 입었던 죄수복에 세계 진 번호와 색깔.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던 곳을 말이다. 자작나무 숲 사이에는 흰 눈들이 덮여있던 시간.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하얗게 물들어 있던 풍경을 기억한다. 긴 회색 담이 펼쳐진 아우슈비츠를.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Arbeit macht frei) 과연 노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우리는 어쩌면 매일 살아남기 위해 긴 인내의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유를 꿈꾸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다며, 소리 없는 절규 속에 하얗게 내려앉은 무릎까지 차버린 눈밭을 걷는 기분이라면 지금의 나를 누군가는 이해해 줄까.
공감이 없는 지하철을 가득 매운 사람들은 철로 위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언제가 글로 쓰고 싶었다. 그리고 르네가 태어났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인간이 생겨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온 힘을 다해 써보고 있는 단편이 하나 생겼다. 여전히 글을 쉽게 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일상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시간은 늘 어둠이 깊은 밤이었다.
나는 여전히 어둠을 이야기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부터 글을 쓰기가 싫었다. 나의 어둠은 보잘것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어둠은 모두가 비슷할 거 같지만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었다. 모든 빛은 어둠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어둠을 외면했다.
나는 내가 가진 어둠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이 빛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게 조용히 나의 두 손이 움직이는 순간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하루라는 시간의 감옥에 지쳐 있었도, 마음만은 편안하고 행복할 뿐이다. 이것이 어느 날 고통으로 찾아온다고 해도. 그래도 나는 행복해할 것이다. 나는 어둠을 말하고 싶다. 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무엇으로든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언어라는 것을 믿고 싶을 뿐이다. 이곳을 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하고 있었던 삶의 의지에 대한 의문들이 조용히 사라져 갔다. 이곳에 비하면 내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아직 숨을 쉬고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이곳의 비극은 나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을 안겨주고 있었다. 사람의 모든 희망의 빛은 어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곳이 내겐 여전히 아우슈비츠라는 곳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