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에 묶인 자들의 변주(變奏)

현실은 상상이 아니다

by 구시안
다운로드 (33).jpg



현실은 상상이 아니다.

실에 묶인 자들의 변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정신없는 연주자들이 모든 것을 멈추고 지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영문을 모른 채, 오랜 시간 동안 연습했던 곡의 악보가 바뀌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연주자들이 의지할 곳은 지휘자 단 한 명뿐이었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며, 익숙한 것에 싫증이 나면서도 '현상 유지'라는 것에 만족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연주자들은 어리둥절한 상황 속에서, 이것을 바로잡아줄 지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지휘자 역시 새롭게 던저진 악보를 들고 어이없어 하긴 마찬가지였다. 바뀌어 버린 악보는 찬란하고 웅장한 음표들이 더해진 변주곡이었다.



새로운 것이 나올 때면, 현장의 분위기는 마치 각자의 악기를 들고 있다가 모두가 그대로 멈춘 것처럼, 관리자들을 기다리며 어리둥절해했다. 왜 갑자기 메뉴가 바뀌게 되었고. 추가가 되었는지, 신 메뉴를 이렇게 급하게 출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들이 여기저기 터지고 있었다. 연말시즌에만 판매할 신상메뉴를 출시하면서 모든 스케줄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각자의 도구가 들려있었다. 마치 자신의 악기를 더 이상 쓰지 않을 거라며 떼쓰는 연주자들처럼 보였다.



" 부장님. 지들이 와서 해보라지. 이게 돌아가겠어요? 현장을 너무 모르는 거 같아요 본사는...."

" 하루 이틀이야. 지겹다. 지겨워."

" 부장님. 기존 메뉴도 이렇게 많은데, 연말 예약도 많을 텐데.... 이거 조치가 좀 필요한 거 아니에요?"

" 부장님. 12월 스케줄 다시 짤까요? 이 메뉴 추가되면 사람이 더 필요할 거 같아요. 휴무들도 조정해야 할 거 같고요..."

" 부장님. 매년 이러는 건 아닌 거 같아요....."



하얀 마스크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들의 불만과 현실적인 고충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말들도 매년 그들이 반복처럼 했던 것이라는 걸 그들은 까맣게 잊었을 수도 있었다. 이 익숙한 합창 같은 노래를 오래 들으면서도, 나는 그들이 이 모든 것을 또 어떻게든 해낼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늘 훌륭하게 한 편의 서사처럼 그렇게 또 해내고야 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쪽으로 아려오는 무언가가 가슴 한편을 찔러대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선 그들의 눈을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모두가 희미하게 말들을 하얀 마스크사이로 흘리며 자신의 악기를 향해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한쪽에 자리해 주방장과 함께 신메뉴 악보를 열었다. 넘길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변화를 거부하는 순간, 이미 내부는 천천히 부식되어 간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시장도, 낮의 사무실도. 사람들은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실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이런 시즌특별 신메뉴 판매에 대한 것은, 대부분 몇 달 전부터 준비되고, 보고되고, 공지되어야 했다. 각 매장마다 회사의 공고를 받아 든 관리자들의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원대비의 스케줄을 다시 올려야 하고, 메뉴 교육을 직원들에게 언제까지 시키고, 각 매장마다 연말시즌이 되기 전 품평회보고는 언제까지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인원보충을 해달라는 회사가 싫어하는 말들이었다. 회사는 불현듯 혼란의 악보를 만들어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 짓거리를 가장 잘하는 존재였다.



시장에는 공휴일이 없었다. 빨간 날의 달력 속에서도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기름 냄새, 젖은 천의 냄새,

그리고 손끝에 맺힌 노동의 열이 낮과 밤공기와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요즘은 공휴일엔 일찍 문 닫는다더라.” 그 말속에는 낯선 변화의 기색이 스며 있었다. 열 시간, 연달아 근무하는 스무 시간의 노동 끝에 찾아온 ‘조기 폐점’. 그것은 휴식이 아니라, 시간이 우리를 점점 밀어내는 방식이었다. 마치 짧았던 악보를 길게 늘여 모두를 잠재울 생각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익숙함을 안락이라 부른다. 그러나 익숙함은, 조용히 사람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이, 그들의 눈빛은 조금씩 빛을 잃었다. 움직이고 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몸들. 회사 안에서도 실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두의 손목에 묶여 있었다. 누군가는 상사의 명령에, 누군가는 조직의 관성에,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이 만든 감옥에 묶여 있었다.



여러 가지 창으로 띄어진 책상 위의 모니터가 빛을 냈다. 그것은 불만의 빛을 부르는 거지 같은 악보였다.

이 불만들에 대한 함성들은 몇 주가 가야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이용하는 대표의 입김이 너무나 악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 매장의 직원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불만들을 포로 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은 언성이라는 것을 회사도 알고 있었다. 때 되면 해내고야 마는 인원들의 노고에 대해 어느 누구도 그들의 땀에 대한 칭찬보다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익숙한 나는 말없이 칼을 들고 신메뉴 하나하나를 주방장과 함께 만들어 보고 있었다. 지금도 나중도 말이 필요 없는 것이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불빛 아래서 사람들은 마치 인형처럼 움직였다. 누군가는 마우스를 쥐고, 누군가는 보고서를 고쳤다.

모두의 표정은 무표정했고, 무표정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변화란 무엇일까. 누군가의 말처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일까, 아니면 조금씩 부서지며 버티는 일일까. 익숙한 구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 안전함은, 곧 멈춤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것을 때가 되면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불현듯 다른 악보를 드리미는 회사에 대한 불만은 매년 있는 일이었다.



회사의 입장도 맞는 이야기다. 멈춰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을 삼켰다. “정말 내가 원하는 건, 지금 이건가.” 회사의 일탈률은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분기별 보고 되는 입사자와 퇴사자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다.



그들의 하루는 그랬다. 불현듯 우울이 찾아오면, 그들은 조용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무기력이 문을 두드리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견뎠다. 그 사이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울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모두의 눈물이 같은 이유였기 때문이다. 시간은 거짓말처럼 흘렀다. 하루가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모든 것은 제자리였다. 다만, 조금씩 무너지는 속도만 달랐다. 그들의 머리 위엔 희미하게 떠다니는 묵언의 생각들이 공기를 흔들었고, 그날 밤, 유리창 너머의 하늘이 잠시 붉게 물들었다.



현실은 상상이 아니었다. 동화 속 해피엔딩은 없었다. 반짝이는 유리구두 대신 남은 것은 늘 닳고 낡은 신발 한 켤레였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오늘도 실에 묶인 채 움직였다. 명령에 반응하며, 복종하며, 가끔은 자신이 누군지 잊은 채 웃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여전히 작은 숨결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아직은 흐릿한 꿈을 향해 있었다.



언젠가 실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믿음. 그 믿음 하나로, 그들은 버텼다. 벽에 부딪혀도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 현실 속의 마리오네트들은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의 실을 느슨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의 손끝에서 그 실이 완전히 끊어질 때, 그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의 발로 한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그때의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낯설고, 조금 더 숨이 트일 것이다.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폭력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내리는 사소한 결심이었다. 다시 걸어보는 일, 다시 믿어보는 일, 다시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 벽에 부딪혀도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그들은 현실 속의 마리오네트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자신의 실을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현실은 상상이 아니다. 하지만 상상을 버리지 않은 사람만이 현실을 다시 쥘 수 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자리를 잡은 가운데 실에 묶인 자들의 변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전 20화아슬아슬한 유리바닥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