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해야 하는 순간 vs 선택을 미루고 싶은 순간
가방은 이미 길 위에 던져져 있는데, 발은 물 웅덩이 앞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다. 몸은 떠날 준비가 되었지만 마음은 아직 뒤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살아가며 겪게 되는 인간적인 갈등이 바로 이런 겹겹의 움직임이었다. 겉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늘 그랬듯 검은색의 옷으로 위장하고 누군가에게 비칠지도 모르는 속 마음을 감추기라도 하듯 겉은 완벽하게 가려있었다. 흐트러진 내면은 내 앞에 물 웅덩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구두는 너무 반짝이고 말끔하지만, 바닥은 젖어 있고 더럽고 얼룩져 있는 것처럼.
겉은 괜찮다고 말하는데, 바닥은 그러지 않다고 말하는 모양새였다. 흔히 보이는 모습과 숨기는 마음 사이의 균열이 그대로 눈동자에 비치는 듯, 잠시 내린 빗물은 계속 고여 있고 길은 젖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머릿속에 갈등은 지금 결정하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발은 조금만 더 버티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지겨운 시간 싸움은 미루면 쌓이고 외면하면 흔적이 남는 것이었다.
짐을 내려놓으면, 다시 책임을 들어야 하는 무게처럼 느껴지는 이 갈등은 반복되며 계속되고 있었다.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 자체가 무게였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상 속에 써야 하는 것들이 들어 있는 무거운 가방은 여전했다. 그 무게는 과거일 수도, 관계일 수도, 선택의 후유증일수도 있는 것이었다. 놓고 떠나면 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잃은 것들이 머릿속에 계산되고 있었다.
사람은 어떤 선택 앞에 서면 몸이 먼저 반응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수백 번 가방을 들고, 길을 건너고, 관계를 버렸다. 새로운 삶으로 향했는데도 발 끝은 눈앞의 고인 웅덩이 앞에서 멈춰 선다. 그 작은 물웅덩이가 마치 거대한 강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한다. 어떤 강이든 건너는 순간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 놓인 가방은 누군가와의 마지막 대화처럼 보였다. 이미 마음속에서 수십 번 접어 넣은 미련이었다. 아직 덜 끝난 문장들이 흩어지고 있다. 놓아버리면 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아버리기까지 너무 많은 마음을 사용해야 하는 관계들이 남긴 끝나지 않은 문장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관계의 끝은 늘 그렇게 찬바람이 스며드는 길 위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모른 채,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균열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헤어짐을 결심한 사람의 의지. 마음은 흐트러져도, 끝내고자 하는 결심만은 닦아 낸 듯 구두는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팔트에 고인 물은 아직 남아 있는 감정의 잔해였다. 어떤 이별은 사랑이 끝나서가 아니라 이 사랑을 더는 감당할 수 없어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대부분 버티다가, 견디다가, 결국 스스로의 잔해를 들어다 본 뒤 떠난다. 손잡이에 얹힌 가방의 무게는 단순한 소지품이 아니라 그동안 묵혀둔 모든 것이었다. 떠남의 갈등은 결국 무거운 것들을 끌고라도 앞으로 갈 것인가의 문제였다.
가장 힘든 싸움은 남과의 갈등이 아니라 나 자신과 시작해야 하는 격투였다. 웅덩이에 비친 흐릿한 구두의 반사처럼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갈등은 늘 그랬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선택을 견딜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매일 떠날 것인가, 버틸 것인가를 생각한다. 잊을 것인가, 끌어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끝낼 낼 것인가, 다시 시작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는 가장 개인적인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늘 그 갈등은 어디선가 멈춰선 발끝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