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은 앞으로 나아간다
가끔은 내가 걸어온 거리들이 먼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저 지나갔을 뿐인데, 그곳들은 오래전부터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묵묵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아침과 저녁 사이, 나는 도시의 틈으로 스며들었다. 사람들의 속도는 언제나 내 걸음보다 빨랐고, 그들의 그림자는 건물 벽에 드리워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공허를 느꼈다. 마치 이 거리들이 내가 잊으려 했던 감정들을 다시 꺼내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검정은 그렇게 내 일상의 기본색이 되었다. 화려한 무늬를 좋아하던 날들도 분명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단색이 내 마음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 되었다. 검정은 슬픔보다 더 조용했고, 비움보다 더 충실했다. 이 색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기도 했고 또 되찾기도 했다. 지금 내 발이 걷는 이 거리가 그 색을 만들어갔다. 여기 이 거리는 누군가에게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길이겠지만, 내게는 사라진 마음과 남겨진 마음이 교차하는 자국이다.
도시의 공기가 차갑게 스며든 날이면 나는 오래된 기억 속 발자국 하나를 손바닥처럼 펼쳐본다. 그 안에는 내가 버리지 못한 수많은 것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안에는 한때 너무 간절했지만 결국 놓아버린 것들이 작은 씨앗처럼 박혀있다.
걷는다는 건, 결국 내 안의 어둠과 화해하려는 움직이었다. 멈추어 서지 않기 위해, 무너진 마음이 다시 형태를 갖추기 위해, 나는 오늘도 아스팔트 위에 조용한 소리를 남긴다.
지금 내가 쓰기 시작한 책은 그 발자국들의 기록이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들, 거리에 그려지는 얼굴들, 말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이 거리 위에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야 알게 되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우리가 어쩌면 같은 거리를 걸었을 수도 있는 서로가 다른 시간 때의 스침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감정의 거리를 이야기하려 한다. 내 발이 돌아다닌 거리는 언젠가 나를 다시 이해할 단서가 되리라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은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발끝에서 쓰여지는 독백들.
이름도, 성별도, 직업도, 성격도 모르는 당신과 내가 걷는 거리에서 언젠가는 마주칠지도 모르는 비슷한 감정으로 물들었던 마음의 조각이 새겨져 있던 거리, 내 발이 걷던 그 거리에 물들었던 마음의 조각들을 조용히 되짚어가는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