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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내린 처방전이 소용없는 날

어느 Gloomy Sunday 의 발걸음

by 구시안



스스로 내린 처방전이 소용없는 날이 있다




스스로 내린 처방전이 소용없는 날이었다. 조바심이 순간적으로 나를 휘감았던 아침길의 발걸음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날의 무너짐은 갑작스럽지 않고, 특정한 사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쌓아 올린 마음의 구조 깊은 곳에서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이 서서히 위로 번져오는 식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오늘 기분이 별로 인가 봐라는 말로 흘려 넘길 기분이 아닌 상태였다. 실제로는 더 복잡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 가슴속 저 아래 저층부의 어딘가에서부터 진동해 오고 있는 것. 그 흔들림을 느끼며 눈을 떴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이미 어떤 문장은 무너져 있었고,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 무게를 품고 있었다. 사람의 하루는 작고 연약한 균형 위에서 버티고 있다. 조금만 흔들려도 균열이 생기고, 그 틈을 타 불안과 피로가 조용히 스며든다. 나는 그 틈을 바라보며 스스로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오늘을 이렇게 흐리게 만들어버린 걸까.



어느 순간 감정은 원인을 잃고, 그저 현상만 남아 나를 무겁게 끌어내렸다. 글이라는 것도 완전한 구원이 아니지만, 최소한 나를 부서지지 않게 붙잡아두는 마지막 끈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느껴지는 기분에 대해 글을 남겨놓았다. 감정 표출의 통로를 확보하는 일이 인간을 무너짐에서 지키는 방파제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말을 깊이 새겨놓은 탓일 수도 있다.



나는 그 통로를 글로 만들고 있었다. 오늘의 글은 억눌린 마음의 잔해들이 천천히 침전하는 자리였다. 글루미 선데이라고들 말하지만, 실제로는 더 복잡했다. 희미한 그림자, 정리되지 않은 고민, 자신도 모르게 쌓아두었던 기대와 두려움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모든 감정이 하나의 색으로 뭉개져 흐려진 날. 다른 사람들은 쉬는 날에 나는 일을 하러 나가야만 하는 오랜된 핑곗거리 밖에 안되고, 여전히 후회되는 나의 선택을 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은 완전히 꺼진 곳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했던가. 기묘하게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맞이한다고.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스스로 내린 처방전이 소용없는 날에도, 언어는 여전히 나를 데리고 조금씩 걸어 나간다고 생각했다. 단지, 무너짐을 인식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지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기록이 아주 느리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내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의 나는 여전히 흐리고, 여전히 무겁지만 그 무게를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은 살아 있는 쪽에 가까워진고 믿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어느 글루미 선데이는, 나를 잠시 멈추게 하고 또 조용히 이어 걷게 하는 날이었다. 버티려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버팀은 붕괴를 더 크게 만든 다는 것을 경험에서 배웠다. 한 번 겪은 일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짓을 하는 것도 사람이라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날이 불현듯 찾아올 때마다, 처진 기분을 다시 억지로 올리려고 할 때, 마음은 더 깊이 가라앉았다. 경험으로 스스로에게 쓰는 처방전도 소용이 없는 날이었다. 겉으로는 흐릿함과 피로로만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 스스로가 다시 재배열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들고 있는 거리를 걸었다. 반복되는 그 길을. 익숙하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느껴지는 길을.



걷는 길이 끝날 때까지, 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복원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나는 늘 오늘의 어둠을 치유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어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내 감정을 주시하는 순간이 어쩌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무너뜨리려는 알 수 없는 힘에 대항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방파제가 강력하다면 사람이 겪어야 하는 이 모든 중력을 더한 무게를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침의 공기가 희미하게 흘려져 있었다. 그 희미함은 날씨 때문이 아니라, 어디선가 오래된 기억이 조용히 떠오르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현재에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잔해 위에 서 있는 날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잔해가 조금 더 가까이 떠오른 것일 뿐이라며 다독였다. 그리고 고요히 정해진 일상 속 지도를 따라 걸었다.



여전히 설명하기 힘든 두려움과 익숙한 슬픔들이 가라앉아 있는 거리. 날카롭고, 오래된 방의 냄새 같은 것들이 거리 구조를 만들어 빌딩을 이룬 곳을 가로지른다. 가장 약한 부분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마음으로 거리의 스쳐가는 모든 것을 바라보며 걸었다. 밟으면 반발력조차 없이 딱딱한 아스팔트 사이로 갈라진 블록들이 길을 만든 곳을 찾아, 떠오르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바람을 가른다.



사람의 마음에는 언어가 도달하지 못하는 자리가 있다. 그곳은 빛도, 시간도, 사고도 정확하게 닿지 않는 깊고 어두운 바닥 같은 곳이다. 원래 말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이 있다. 말로 이해되기 전에 내 몸에 스며드는 감정이 지금 걷고 있는 말이 전달되지 않는 거리를 수놓고 있었다.



무기력함도 슬픔도 아니었고, 두려움이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그저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가슴 아래쪽에 조용히 가라앉아 걷고 있는 다리로 전달되어, 서로 교차되며 무감각하게 걷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남겨며 아스팔트 거리 위에 흩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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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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