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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의 출산과 붕괴 그리고 마녀의 욕심

인간의 출산

by 구시안


사람은 서서히 무너지는 존재입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는 균열처럼 시작되는 것이지요. 아침 햇살 속에서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 뒤, 손끝에는 알 수 없는 떨림이 남고, 심장은 하루 종일 가만히, 그러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산하듯 뛰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의 낡은 책장 속에 잠들어 있는 언젠가 읽어 보았던 심리학자들이 쓴 책 속에는 이것을 정신적 탈진이라고 표현해 놓았더군요.



인간이 갖고 있는 감정의 체계는 흔들리게 만들어져 있지요. 통제력이 미묘하게 줄어드는 상태를 당신도 경험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설명은 붕괴의 본질을 완전히 담아내지 못한답니다. 당신이 겪는 붕괴는 단순한 뇌 속 화학작용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세계 전체가 서서히 균열을 맞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죠. 아래에서 끊임없이 작은 회오리들이 돌며 사람의 의식을 흔드는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오며 맺어온 관계 속에 생긴 미세한 상처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손으로 건질 수도 없고, 결국 스스로의 내면에 갇힌 채 스스로를 관찰하는 유령이 되어야만 하는 일이랍니다. 마치 저같은 존재처럼 말이죠.



부헨발트도 서서히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레타는 한밤 중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의 모퉁이를 물고 자신의 배에서 탈출을 시작한 아이의 사정없는 움직임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요. 그녀의 진통은 놀랍도록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산통이라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통증이 아니었죠.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왜곡하는 경험이며, 몸과 마음을 동시에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레타의 자궁이 수축하며 아기를 밀어내는 순간, 근육과 신경은 강렬한 신호를 뇌로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느낄 수 있었죠.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향기를 품고 있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그레타의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어 심장은 빠르게 뛰고, 그녀의 혈류는 미친 듯이 속도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레타의 손끝은 허공을 가를 뿐, 통증의 리듬 속에서 숨이 점점 얇아지고 의식은 흐려져 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근복적 취약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었지요. 그녀의 몸은 삶을 낳기 위해 설계된 구조지만, 동시에 가장 연약한 존재임을 증명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녀 입에 물려 있던 이불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뒤에 퍼진 고통의 포효는 어느 산속 짐승의 것처럼 마녀의 성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녀의 방에 불이 켜지고 하얀 실크 잠옷을 길게 늘어트린 그녀의 손에는 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지요.



" 죽여버릴 거야! 둘 다 죽여버릴 거야! "



마녀가 그레타의 작은 방에 문을 발로 차고 들어섰을 때, 이미 그레타의 다리 사이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있었지요.



" 더러운 년. 더러운 년."



마녀가 쥐고 있던 권총의 머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그레타의 머리와 배 사이를 오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향기에는 불안이라는 단어가 흐르고 있었죠. 이를 악물며 다시 그레타의 머리를 향해 총머리를 두고 방아쇠에 힘을 넣어보지만, 그녀는 그레타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이를 들고 기뻐하고 있는 카를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지요. 자신이 이 둘을 죽인다면 카를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짙게 주름 잡혔던 마녀의 미간은 천천히 흐려져 갔습니다.



마녀의 검지에 쏟아져 있던 힘을 풀고 나자, 그녀는 응접실에 놓인 전화기로 다가가 수용소 의무실담당관인 구스타프에게 지금의 현장을 설명하고 있었지요. 고통스러워하며 뒤척이고 있는 그레타를 가만히 지켜보며 비웃듯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고통이 마치 웃긴 흑백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녀는 느끼고 있었지요. 잠시 후 구스타프가 별장안으로 들어오고 그녀의 출산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마녀는 아직은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녀의 비명조차 사그라든 출산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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