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색

'나'라는 인간에 대하여

by 구시안



"시간의 색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색은 밝은 색이었다. 시간 속에 나의 색은 검은색이 되었을 뿐이다."





마흔 살이 지나고부터 나이를 애써 새거나 각인하면서 살진 않았다. 이제 숫자 따위는 더 이상 내게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늘 그다음이 문제였다. 살아가며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스쳐가며 겪어야 하는 것들에 남은 잔상들이 처리되지 않고, 시간 속에 쌓여간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반복하는 순간이 많았다. 그것은 진심과는 다른 번역되어 가기도 했다. 그 한계에 대한 물음표에 스스로 드리웠던 건 두꺼운 검은 벽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색을 섞고, 줄이고, 늘이며 살았다. 패션이라는 캔버스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고 내 마음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색과 선, 질감과 비율을 만지며 무언가를 창조하고 이어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세련됨과 만족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손끝에 남은 색이다. 그러나 색은 늘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평가와 기대 속에서 어떤 색은 사라지고, 어떤 색은 부서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름다움 뒤에도 늘 실패와 불안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을.



하루 세 시간 정도의 잠으로 사람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현실에서 알아갔다. 살아가며 나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십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고, 주변의 친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출 때, 나는 여전히 ‘시조새’라 불리며 나만의 세계 속에서 일을 이어갔다. 주변에선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들이 칸칸마다 도사리고 있었다. 작은 부스마다 숫자가 새겨진 감옥에 모두가 성공이라는 탈출을 꿈꾸며 자신의 색을 보여주며 가석방되기를 기다렸다. 빠르게 탈옥을 감행하는 이들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탈옥범들은 매우 현명한 선택을 한 자들이었다. 매일 밤 같은 곳에서 숨 쉬고 밥을 먹지만 그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모두가 적일 뿐이라는 것을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알게 되었다.



시간은 순살같이 흘러 모든 것을 무덤으로 만들 듯 지나갔고, 그 사이 나는 자신만이 아는 특별함을 붙들고 있었다. 너무 맛있지만 나누기 힘든 것, 혼자서는 잘 알지만 남은 모르는 것,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망이 어떤 것인지를 시장에서 배웠다. 내가 디자인하고 내가 운영하는 브랜드를 한다는 것이 힘들지만 행복했다. 그 모든 것을 나는 품었다.



디자인이라는 세계는 창조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도 성공과 실패의 경계가 늘 있었다.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같은 것이었다. 의도한 색감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 실패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 되었다. 나의 옷을 내가 생각했던 기대보다 더 많이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친 듯이 옷을 만들며 살았다. 모든 것이 더 잘 될수록, 늘 불안을 안고 짧은 잠에 들기 일쑤였다.



내가 만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 그 실패의 무게 앞에서 사람의 심리를 읽고, 사람을 설득하고,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모든 고뇌가 덮쳐왔다. 그리고 병이 났다.



몸도 마음도 병이 났다. 패션을 한지 십칠 년 되던 겨울 나는 커리어를 버리고 다시 구시안이라는 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한동안의 방황은 길었다. 그 인생 산책길에 다시 들어선 길은 요식업이라는 세계였다.

그 갈망과 고독 속에서 나는 요식업에 발을 들였다. 패션이 공기, 빛, 질감을 다루는 일이라면, 요식업은 사람의 몸과 마음, 숨결과 온기를 다루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나는 또 다른 싸움을 마주했다.



손끝에서 완성되는 음식이누군가의 기대와 다르게 받아들여지면 그 순간 나의 자존심과 책임감, 불안과 분노가 뒤섞였다. 요리도 결국 사람과의 싸움이었다. 맛을 평가하는 사람, 시간을 재촉하는 사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매 순간 선택과 판단,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다. 요식업을 하며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사는 문제가 아닌,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요식업에 종사한 지 십 년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스쳐갔던 사람들. 패션과 요리, 두 세계는 달라 보였지만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사람의 심리와 마주하며, 자신을 지키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싸움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누군가를 설득하며, 또 다른 누군가의 실망을 받아내야 하는 고된 노동. 그 싸움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 지금도 애쓰고 있다.



손끝에서 완성되는 음식이 누군가의 배와 마음에 닿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창조와 성취를 느꼈다.

패션에서의 정밀한 손끝과 요리에서 느끼는 체온과 감각이 서로 다른 듯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삶은 여전히 혼자였다. 나는 고요한 날을 찾아다녔다. 휴대전화 벨소리와 사람들의 시선을 끊고,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 그 안에서 스스로를 지켜냈다.



과거의 빛과 어둠, 패션에서 느낀 찬란함과 요리에서 체감한 인간적인 열기까지, 모든 경험이 내 안에서 층을 이루었다. 그리고 나를 고요 속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 층 속에서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잃어가는 것과 얻는 것, 사람과의 싸움에서 승리와 패배를

조용히 저울질했다.



살면서 사람들은 종종 자기만큼 힘들고 피곤한 사람이 없다고 떠든다. 하지만 감정을 얼버무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이유를 달고 살지 않기 위해 고요한 날을 즐기며, 모든 것에 삭제 키를 누르듯 살았다.

패션과 요리를 오가며 쌓인 감각은 나만의 고요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었다. 그 성공의 순간이. 그 실패의 순간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힘들어한 적도 있었지만, 모두가 내 생각과 달리 비슷하게 얽혀 있고, 생각이 빠르게 전환되는 경험들을 주변에서 보고 나서는 한편으로 동지애가 생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혼자가 편했고, 멀리서 보는 게 좋았다. 결국, 모두가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고, 우선순위에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의심 없이 깨달았다. 시간은 사람들에게 선을 긋고, 정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줬다.



침묵이 금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것이 보배라는 말도 사실 의미가 없었다.

할 말을 분명히 해야 하며,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들의 말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불분명했다.내가 생각하는 침묵은 철저히 감상적인 것일 뿐,우유부단함과 직결된다.



살면서 후회하는 몇 가지를 되뇌는 놀이를 가끔 한다. 가장 원초적인 울부짖음은 존재하지만, 사람은 늑대가 될 수 없어 하울링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지금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법칙이다. 혼자 감추고, 은폐하며, 담아내는 마음의 창고에 쌓이는 스스로의 메아리를 고요하게 잠재워야 하는 날, 나는 최대한 가장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



글을 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일이 되어 있다. 그 소제와 제목이나 인물을 설정하는 일도 상관없었다. 시간 속의 내가 가진 색이면 충분했다. 오랜 시간 일기처럼 써 내려가는 모든 것들에는 나의 색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시간 속에 쌓여 있는 색들. 사람들이 내게 새긴 색들이. 내가 스스로 새겨놓은 색들이. 나는 이것을 꺼내 들고 누군가가 읽을지도 모르는 언어라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아졌을 뿐이다. 그것이 가장 솔직하고 진실되지만 누구나 공감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주변 시선이나 스쳐가는 사람들을 감지하지 않고, 가장 편안한 곳에 자리해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고요함을 찾고 있을 뿐이다. 하고 싶은 소리를 다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를 잃는다. 하고 싶은 소리를 감추며 살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를 잃는다. 그럼에도 가장 자유로운 출구는 스스로에게 고요한 날을 선사하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그것이 편안할 뿐이다.



이 고요 속에서야 나는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하고, 살아온 시간을 조금 더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이 수많은 색들로 가슴속에 새겨져 밤이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지난날의 나의 직업이나 지금의 나의 직업 속에 같은 하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색들도 더해지고 있다. 그 색들을 혼합하여 아름다운 색을 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시간의 색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색은 밝은 색이었다. 시간 속에 나의 색은 검은색이 되었을 뿐이다.

가면 같은 밝음보단, 솔직했던, 처절했던 내면 속의 거울 비친 어두웠던 그림자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오히려 내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어둠에도 빛은 있다. 그 빛이 찬란하게 빛날 수도 아닐 수도 있다.손끝에 남고, 마음에 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나를 비춘다는 것을,나의 색이 구현해 내는 내가 스스로 써 내려가는 모든 것들이 자유롭기를 바랄 뿐이다. 나 아닌 그들도 시간 속의 색이 언어가 되고, 하루에 새겨지는 언어가 풍부하여 자유롭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나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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