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을 보다가 책을 펼쳤다
사색으로 젖는 밤은 언제나 생각보다 더 느리게 걸어온다.
해가 가라앉고 방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어갈 때, 나는 오래된 필름 한 조각처럼 흐릿해진 마음을 붙들고 앉는다. 오늘은 앙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을 보다 멈춰섰다. 스크린 속 잿빛 숲을 헤매던 인물들이 갑자기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죄의식, 타자의 고통, 신의 침묵이 겹겹이 쌓여 한밤의 공기처럼 무거워졌고, 나는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를 확인한다.
책상 위에 있던 하시모토 게이고의 편지는 흰 종이처럼 담담하게 나를 받아주었다.
활자들은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면서도 끝내 침묵을 지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침묵에 오래 귀 기울였다. 말을 더듬듯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서 나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건네는 마음의 무게를 견주어 보았다. 편지는 결국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쓰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견디기 위해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러다 문득, 손에 굴러다니던 다이소에서 산 노란색 작은 단어장을 집어 들었다.
값싼 종이에 연필로 긋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내 속의 어둠을 조금씩 정리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지나가는 생각들을 붙잡아 적었다.
‘속죄.’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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