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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는 여전히 해방이 없다

자유를 말하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by 구시안

시장은 언제나 자유를 말한다.
선택의 자유, 경쟁의 자유, 소비의 자유. 무엇이든 고를 수 있고, 누구든 올라설 수 있으며,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시장은 스스로를 해방의 공간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 자유는 이상할 만큼 피곤하고, 그 해방은 어딘가 숨이 막힌다. 시장 안에서 우리는 분명 자유롭다고 불리지만, 정작 자유로워졌다는 감각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시장은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요구한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 멈추는 순간은 곧 뒤처짐이 되고, 뒤처짐은 곧 무가치함으로 번역된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 된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생산적인지, 얼마만큼의 가치를 창출하는지로만 평가된다. 시장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대신, 인간을 수치로 환원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는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떤 물건을 살지, 어떤 삶을 살지. 하지만 그 선택의 목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시장은 무한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택 가능한 것만을 진열해두었을 뿐이다. 선택하지 않을 자유, 속도를 늦출 자유, 성과를 내지 않을 자유는 목록에 없다. 시장은 “원하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원하지 않아도 선택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를 만든다.



시장에서의 자유는 조건부다.
성과를 내는 한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한에서, 쓸모가 있는 한에서만 허락된다. 그 조건을 벗어나는 순간 자유는 사치가 되고, 무능이 되며, 게으름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우리는 쉬면서도 불안하고, 충분히 가지고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시장은 결핍을 해결해주는 곳이 아니라, 결핍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시장은 감정마저 관리한다.
슬픔은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되고, 분노는 리스크가 되며, 불안은 동기부여라는 이름으로 재포장된다.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조절해야 할 것이 된다. 긍정은 미덕이 되고, 우울은 결함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조차 시장 친화적으로 길들인다. 마음의 속도보다 성과의 속도를 먼저 배우게 된다.



해방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해방은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쓸모를 입증하지 않아도 되며,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러나 시장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시장은 우리에게 계속 묻는다. 너는 누구보다 나은가? 너는 지금 충분한가? 너는 쓸모 있는가? 너는 포기할 것인가?



그래서 시장에는 해방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잠깐의 착각이거나, 다음 목표로 넘어가기 전의 짧은 휴지기일 뿐이다. 성취 뒤에는 곧 더 큰 기준이 오고, 안정 뒤에는 더 치열한 경쟁이 기다린다. 만족은 유예되고, 충분함은 항상 미래형이다. 시장은 결코 “이제 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장 속에서 살아간다.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질문할 수는 있다. 이 속도는 정말 나의 것인가, 이 기준은 누구의 기준인가, 이 불안은 어디서 왔는가. 시장이 답을 주지 않는 질문을 붙잡는 순간,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에서 비로소 인간적인 것이 스며 나온다.



해방은 시장 밖 어딘가에 있는 거창한 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작게, 자신을 숫자로만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효율보다 의미를, 경쟁보다 존엄을 한 번쯤 선택하는 순간. 시장의 언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려는 시도. 그 사소한 저항이 쌓일 때, 우리는 비록 시장 안에 있으나 시장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시장은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더 빨리 가라고, 더 높이 오르라고, 멈추지 말라고. 그러나 가끔은 그 말에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것, 모든 비교에 참여하지 않는 것,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인정하는 것. 어쩌면 그곳에서, 아주 불완전한 형태의 해방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시장은 해방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해방해야 한다. 아주 느리게,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지금보다 더 총명해진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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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49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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