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적인 쾌활함에 대하여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실을 말한다고 믿으며 말한다.
그러나 그 말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사실이며, 또 얼마나 많은 것이 사실인 척하는 과장이고, 혹은 의도적이지 않은 거짓인가. 더 나아가 묻자면, 사실이라는 것은 과연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사무적인 문서 한 장, 회의실의 보고 한 문장, 혹은 이력서의 한 줄에서도 매번 반복된다.
과장은 대개 악의 없이 시작된다.
“조금 더 성과를 강조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상대방이 기대하는 답이 그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장은 거짓이라기보다는 윤색에 가깝고, 윤색은 종종 사회적 윤활유처럼 기능한다. 문제는 이 윤활유가 반복 사용될수록, 마찰을 줄이는 대신 표면 자체를 닳게 만든다는 데 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 어떻게 보이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거짓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거짓은 의도를 가진다. 숨기거나, 바꾸거나, 대체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거짓이 거창한 음모나 도덕적 타락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거짓은 사무적인 필요에서 탄생한다. 보고 기한을 맞추기 위해, 책임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혹은 조직이 요구하는 낙관의 수치를 충족하기 위해. 이때 거짓은 감정적이지 않고, 차분하며, 놀랍도록 효율적이다. 그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관리’라고 부르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진실은 늘 중심에 있지 않다. 대개는 구석에, 문장 사이에, 각주처럼 존재한다. 미미한 진실은 말해도 아무도 박수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당장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미미함이야말로 진실의 성질이다. 진실은 과장처럼 부풀려지지 않고, 거짓처럼 방향을 갖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다. 불편하게, 애매하게, 그리고 종종 쓸모없어 보이게.
사무적인 쾌활함이란,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웃으며 넘기는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진실이 미미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적당한 과장과 관리된 거짓을 배치해 문서를 완성하고, 회의를 마무리하고, 하루를 정리한다. 이 과정은 냉소적이지 않다. 오히려 매우 성실하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성실함,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성실함이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은 남는다. 이러한 성실함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실을 조금씩 밀어내며 쌓아 올린 구조물은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일지 모르나, 그 안에서 말하는 주체는 점점 자기 자신의 언어를 잃는다. 말은 남아 있으되, 믿음은 줄어든다. 결국 우리는 가장 중요한 보고서—자기 자신에게 제출해야 할 보고서를 쓸 수 없게 된다.
미미한 진실을 지키는 일은 영웅적이지 않다. 그것은 대개 불리하고, 느리며,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진실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과장과 거짓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모두가 능숙해지고, 모두가 쾌활해지며, 모두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사무적인 쾌활함의 종착지라면,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효율과 안락함 사이에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거창한 진실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미미한 진실을 삭제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문장 하나를 덜 꾸미고, 수치 하나를 덜 올리고, 모른다는 말을 한 번 더 허용하는 것. 그것은 조직을 무너뜨리지도, 관계를 파괴하지도 않는다. 다만 세계를 약간 덜 매끄럽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그 약간의 거칠음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말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진실은 늘 작고, 느리고, 불편하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과장과 거짓 역시 스스로를 절대화하지는 못한다. 사무적인 쾌활함이 완전한 공허로 변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미미한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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