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되다
"붙여져 있던 모든 것은 뜯긴다."
붙여져 있던 모든 것은 뜯긴다.
모든 것은 언젠가 뜯긴다.
붙여 놓았던 것이든
걸어 두었던 것이든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것과 교체되며
그 자리를 내어준다.
마음 상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도 숙취로 멍한 머리로 생각한다.
취중진담이든
오래 눌러둔 진심이든
술 한잔에 터져 나오는 말엔 언제나 기준이 없다.
잘난 척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았다면
신은 우리 모두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선사했을까.
지금쯤은 나도 조금 더 행복했을까.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다르다.
늘 믿어야할 것과
믿지 말하야 할 것들 중을
선택하여 이어지는 게임일 뿐이다.
한동안 쉬었던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자기 관리라는 핑계로 작은 행복을 느끼지만
“자기답게 빛나라”
“작은 행복이 소중하다”
그런 말들은 어느새 공허하게 들린다.
성공을 설파하는 책들 속 문장은
이제 내게 아무런 울림이 없다.
세상엔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녹천의 물고기가 커 보인다는 말처럼
타인의 것이 더 커 보일 때가 있다.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지만
간은 되돌릴 수 없다.
어릴 적 아무렇지 않게 버렸던 것들이
지금은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렇게 하루하루 오르락내리락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지만
현실은 늘 현실이다.
삶이 잘 풀리지 않을수록
인간은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특히 여름이면,
머릿속엔 온통 휴가 생각뿐이다.
세상은 기묘하게도
정말 내려놓고 싶을 때쯤
잠시 쉴 틈을 마련해 준다.
잠깐의 충전 후,
우리는 다시 일상 속
세렝게티 같은 정글 안 생존율 속으로 들어간다.
비가 내리는 오후,
전깃줄 위엔 보기 드문 참새들이
빗속에서 깃털을 털며
작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커피를 내린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조용히 앉아 노트북을 열어
이 글을 쓴다.
가장 ‘혼자다운 시간’.
고요한 방엔 스탠드 불빛 하나뿐.
그 묘한 밝기에 익숙해져
이제는 그 불빛 없이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현관문을 여니 택배가 쌓여 있다.
새 바지, 생필품,
그리고 고장 난 블루투스 스피커를 대신할 새것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작은 산처럼 쌓여 뜯기길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를 버리고 나면
다시 새로운 것을 들여야 하는 법.
출퇴근길 터널 벽에
포스터들이 뜯겨 나가고
새것으로 덧붙여진 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그 반복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어 왔는지.
뜯기고 덧붙여진 자국은 두꺼워지고,
그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도 그렇다.
새로운 것을 붙여도
이전의 자국은 남는다.
그 사실을 늘 외면하며
감추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가끔 나는 모든 연락을 끊는다.
친구도, 지인도,
일로 알게 된 사람들도.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년을 방치한다.
그것이 이기적이라면,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필요하다.
단지, 내가 먼저 끊었을 뿐이다.
텅 빈 시간을 견디며
나는 나만의 고요를 만든다.
그 고요가
내겐 가장 편안한 상태다.
삶은 언제나 예보와 다르다.
뜻하지 않게 비를 맞듯
예상치 못한 일에 젖는다.
누군가를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결국 나의 선택이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시간.
나는 여전히 나만의 방에서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있다.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시간은 어김없이 뜯겨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