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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복화술사

침묵을 선택한 복화술사의 언어

by 구시안

말은 언제나 입보다 마음에서 먼저 태어난다.
그러나 마음에서 태어난 모든 말이 언어의 형태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말들은 생각이라는 양수 속에서 충분히 자라지 못한 채, 혹은 너무 크게 자라 버린 탓에 세상으로 나올 통로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한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밀도의 감정이 선택한 또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끝내 하지 못한 말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음의 구조를 바꾸며 남는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내면에 저장되고, 그 저장 방식은 종종 삶의 태도가 된다.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 유난히 조심스러워지고, 어떤 상황에서 이유 없이 피로해진다. 그 모든 흔적은 말하지 못한 말들이 남긴 잔상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표현된 감정보다 억압된 감정에 더 크게 지배된다.

표현된 감정은 관계 속에서 소진되지만, 억압된 감정은 내부에서 반복 재생된다. 그래서 말하지 못한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정교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서운함이었을 것이, 어느 순간 ‘나는 늘 참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으로 굳어진다.


“사실은 싫었어.”
“그때 많이 외로웠어.”
“너를 미워한 게 아니라, 나를 지키고 싶었어.”


이 문장들은 너무 솔직해서 말해지지 못했다.

우리는 흔히 솔직함을 용기의 문제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이 말을 꺼냈을 때 잃게 될 것과 지키게 될 것을 동시에 계산하는 순간, 인간은 대부분 말을 삼킨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유보하는 선택.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사회적 지능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관계를 지키려 할까.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립은 자유를 주는 동시에 존재의 근거를 빼앗는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진실보다 연결을 택하고, 말보다 침묵을 택한다. 침묵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자, 자아를 잠시 유예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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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6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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