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네모시네 (Mnemosyne)

기억을 소유하지 않기로 한 사람의 태도

by 구시안

므네모시네 (Mnemosyne).

기억의 여신. 그리고 동시에, 기억을 통제하는 힘.

올림포스 신들보다 더 오래된 원초적 존재.




커피. 삶은 계란. 두유 한 개.

바질이 들어간 파스타. 그리고 먹지 못하는 고수의 진한 향.

쿠키. 토마토. 커피. 그리고 또 커피.


기억을 해놓으려 적어두었던 메모지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늦게 알았다. 구멍이 난 인원 때문에 불이 나게 그것을 매워주러 용산점을 찾았다. 여전히 바쁘고 지쳐 보이며. 쇼핑몰 자체가 이렇게 따뜻한데도 그들의 입에서는. 몸에서는. 추위에 떠는 듯. 하얀 김이 나고 있었다.


빵과 필요한 다른 식품들을 장바구니에 던진다. 바쁜 용산 점장을 대신해 발주를 하며 둘러보는 매장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방은 안갯속을 걷는 듯했다.


열기. 뜨겁지만 전혀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그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은 기계적으로 정리를 시작하고. 달걀을 잔뜩 삶아주고. 홀로 나가 테이블을 꾸며준다.


일손이 모자라기 시작한 주방에 들어가 토마토 껍질을 까고. 각가지의 야채들을 한가득 썰어주었다. 끔찍한 일은 오늘 생기지 않으리라 혼잣말을 하면서. 그저 사람들은 식사를 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할 뿐이라며. 오늘은 날이 추우니 입들이 얼었을 거라며. 간신히 그렇게 식사만 하는 입으로 마무리될 거라고.


땀이 나면서도 추운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생각일 뿐이라고. 그저 감정일 뿐이라고. 지금 너는 위험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조리대 위에 놓았던 커피를 찾았다. 유니폼은 금세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추운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손을 갖다 댄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새로 들어온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은 하지 않는다. 말없이 묵묵하게 일을 해내고 있는 젊은 청년이 기특하여. 같이 담배를 몇 번 핀 것이 전부인데도. 예의가 바르고 정직하여 그것이 거짓처럼 보이지 않아서. 이런 세계에 들어와 사서 고생을 하게 되기까지 어떤 꿈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마음이 훌륭하고 기특해서. 힘을 내라고. 멋쩍은 듯 웃어 보이는 모습에 잠시 힘이 났다.




매장에 등장한 인형같이 생긴 작은 공주님 같은 여자아이. 그 아이의 팔꿈치에는 토끼인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핑크색인지 하얀색인지 잘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동화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어서 홀에 있는 직원들의 눈과 매장에 자리하여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눈을 한꺼번에 사로잡았다. 소녀는 이런 일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한 곳만을 응시하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그 여자아이가 앉은 테이블을 보니. 그 여자아이는 밥을 거부하고 냅킨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나이가 들어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다가가 무엇을 그리는지 보고 싶었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글자였다.


기억.

분명 크고 이상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아이가 그리던 것은 그림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글자였다. 아홉 살 혹은 열 살 쯤의 소녀일까. 왜 '기억'이라고 쓰는 것인지.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엄마라는 사람은 자기의 입을 챙기기 바빴다. 딸에게 한 번 더 권유하지 않은 채. 그것을 포기라도 한 듯. 딸아이가 먹든 말든.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에 몰두한 사람처럼.


문득, 므네모시네라는 그리스 신화의 여신이 생각났다. 기억의 어머니. 기억의 여신.

저 아이에게는 무슨 기억이 저렇게 크게 그려질 만큼 쓰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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