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혹은 늑대

낮은 나를 놀라게 하고 밤은 나를 시험한다

by 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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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한 마리가 제 발자국을
눈 위에 올려 놓았다가
모래 위나
진흙 속에 파묻히는 것이 싫어

삶의 흔적이라도 남기듯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걷는다.


그렇게 삼청동을 돌아다니는 날,

모든 것은 맑게 개어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일치된 혀와 무지한 손이
사진을 찍어라, 남겨라 말하고
폭풍우가 걷힌 도시를 걸으며
나는 그렇게 영역표시를 하고 다녔다.


착란적인 공간과 빛의 힘.
그 빛들은 자신의 힘도 모른 채
살갗을 뒤덮는다.

눈 사이에 드리운 인공적인 밤이 무색하게
한순간 불타오르는 동일한 궁전을 걷듯
좋아하는 산책로를 거닐었다.


엉뚱한 보물을 찾으러 나서는 사람처럼
다이아몬드의 물결이 드리워진 하늘 아래를
자유롭게 걸었다.

현실 속에서 최상의 명상은
너무 쉽게 바스러진다.


늦은 점심,
가스가 떨어진 라이터,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형이상학을 스쳐가며

도시의 소음은 과도했고
혼란스러웠지만
귀마개 속 음악처럼
나는 삼청동의 모퉁이와

마음의 지도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머리카락도 아주 짧게

잘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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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들러 전시를 보고
그 안의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 들고 나오며
사고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행세를 내듯

기존의 것들을 밀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이치를 신기하게도

어느 작가의 그림 한 점에서 발견하게 되었다면

믿어줄까.

믿거나 말거나다.


새로운 땅을 까는 기분으로
유일한 행로를 포기하고
순응과 굴복 사이에
다리를 놓으며 걷는 듯했다.


내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표현 욕구에 기대어
가짜 감정을 만들어내는 지성이 생겨나는 것인지.

쉬는 날의 산책은
삶의 경험이 지식과 무관하다는 듯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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