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時節因緣)
시절인연(時節因緣)을
이제는 그만 만나고 싶다.
만나야 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는 말, 그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웃고, 즐겁고, 이해하고, 그러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부서지기를 반복하면서도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게 되는 사람들. 그들이 내 남은 삶 속에서 얼마나 더 마주치게 될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시절 인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들이 내게 얼마나 더 다가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새벽의 고요 속에서 조용히 번져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우연처럼 다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또 각자의 일들을 겪게 되는 그 과정을 떠올릴 때마다 학자들이 남겨둔 수많은 이론과 지식들을 아무리 읽어도, 직접 경험해 봐도, 결국 다시 의문이 생긴다. 사람과의 인연만큼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며 생을 마감해 가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사람도 공간도 머무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의 인연이라는 굴레는 이미 각자의 인생에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고 있는 듯하다. 이왕이면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조용히 떠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남에게 준 상처들을 떠올리면, 그 또한 부인할 수 없는 내 지난날의 일부임을 인정하게 된다. 힘들 때마다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다’라며 의미를 붙이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지겨워질 때가 있다.
얼마 전엔 이렇게 기도했다. “부디, 사이코패스만은 되게 하지 마소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의미’다. 사이코패스란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이 아니라, ‘나만’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내가 먼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갖고 난 다음에야 너. 그렇게 자기중심의 욕망에만 집착하는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때때로 잃어버린 열정을 되찾으려 배우기도 하고, 나를 찾는 여행을 꿈꾸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여행조차 마음속에서만 가능한 무거운 일상이란 늪에 빠져 사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리움만이 남고, 추억은 무겁게 쌓여간다. 사람은 언제나 비참하고 힘겨울 때, 믿지도 않던 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건 어쩌면 혼자서 펼치는 모노드라마 같은 것이다. 관객 없는 무대 위에서 울다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여는, 반복되는 일상의 한 장면. 신의 대답은 없고, 오직 무릎의 저림만이 남는다.
신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조차 내게 떠넘기며, 힘들 때만 나를 찾는다. 지겨워.” 그래서 신은 인간에게 철벽을 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자비는 점점 멀어지고, 인간은 스스로를 구해야만 하는 존재로 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벼랑 끝에 몰릴 때가 있다.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고, 항우울제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내 인생을 정리하는 데는 박스 몇 개면 충분하겠구나.’그 단순한 진실을 잊고 살아왔다는 것을.
고통을 덜어준다는 발리의 코끼리 신들이 세상 곳곳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코끼리 한 마리 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보다 남을 위해 기도했을 때 마음이 더 편안했다. 그건 곧 아픔 속에서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이제는 기도 대신 글을 쓰기로 했다. 대답 없는 신을 기다리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신은 존재를 인정받길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정치인과도 같다. 그 답답함 속에서도, 나는 나의 순례길을 스스로 걸어가려 한다. 그 길 위에서 다시 ‘시절 인연’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이야기가 쌓여 나만의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가며 살다 죽는 것이다.
그 영화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상처로 남든, 기쁨으로 남든 결국은 모두 지나가야 할 장면들이다. 그 모든 인연이 끝나는 날, 나는 조용히 필름을 되감아 나만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처럼 다시 볼 것이다. 그 영화 안에 등장하는 시절인연(時節因緣)들이 너무 많지 않길 바란다. 이미 스쳐갔어도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소슬한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는 길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와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