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할 수 없는 운명

나는 이미 지나간 곳에 서 있었다

by 구시안

침묵하는 몸이 기지개를 켜며

긴 밤에 덮고 잤던

검은 모래들을 털어낸다.


제 갈 곳을 잃은 별들로 뒤덮여 있는

방안으로 한 줄 빛이 나에게로

넘어와 부서지니

저토록 빛나는 것은

처음이라는 듯

녹슨 별들이 하늘로 도망가고

사람 키만 한 나무 하나가

방으로 들어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푸른빛 소에서

그늘을 약속하는 나무의

소리 없는 알람에

도시로 성큼 넘어가

바다가 아닌

하얗게 부서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다정한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만

저토록 빛나는 것에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 졌다.




나는 어느 날, 이유 없이 길을 벗어났다. 발밑의 돌들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고, 하늘은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낯익은 색으로 흔들렸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내 발걸음 아래서 휘어지는 얇은 금속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위를 걷고 있었고, 동시에 미끄러지고 있었다.


운명이라는 단어는 너무 무겁다. 그것은 마치 이미 정해진 길 위에 덧칠된 검은 잉크 같지만, 내가 마주한 것은 오히려 흩어지는 재에 가까웠다. 손에 쥐려 하면 바람에 날아가고, 외면하면 눈 속으로 스며드는 것. 그래서 나는 의심했다. 우리가 말하는 운명이란, 결국 우리가 붙잡지 못한 것들에 대한 변명은 아닐까.


그날의 공기는 낯설게 따뜻했고, 나는 처음 보는 골목에서 오래된 기억을 발견했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벽에 남아 있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슬픔이 창문 틈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지나쳤지만, 그것들이 나를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름 없는 역에 도착했다. 기차는 오지 않았고, 떠난 적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플랫폼 위에는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한 그림자가 몇 개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발끝을 응시하며, 보이지 않는 선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 선은 어쩌면 각자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가늘어서, 조금만 흔들려도 사라질 것 같은.


나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아니,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너진 탓에 오래인지 짧은 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억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이름과 얼굴이 흐려지며, 결국에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얇은 연기처럼 희미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운명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씩 지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가 도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소멸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움직인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흔적은 남기려 할수록 더 빠르게 사라진다. 내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발자국도, 숨결도, 심지어 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증명할 수 없는 빈 공간만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웃었다. 그것이 슬픔인지 안도인지 구별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유일지도 모른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사실,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확실함.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은 두려움이 아니라, 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고, 방향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발걸음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 것이라는, 아니 어쩌면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화,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