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할 약속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약속을 안고 온다.
누구와도 맺지 않았으나,
이미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태어난다.
그 약속은 언어 이전의 울음 속에,
손끝의 미세한 떨림 속에 숨어 있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몸의 깊은 층으로 내려가
뼈의 기억이 되고, 무의식의 잔향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잊었다고 믿지만,
잊음은 언제나 기억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과의 약속을 끝내
완수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완벽한 약속은 신의 것인가.
깨진 약속만이 인간의 것인가.
그 소리는 몸 안으로 들어와
마치 오래된 심장처럼 다시 박동한다.
그의 손은 주머니에 닿아 있다.
주머니 속은 비어 있다.
그러나 손끝은 그곳에서
어떤 온도와 기억을 꺼낸다.
한 장의 쪽지, 반쯤 지워진 글자.
그 글자들이 그의 얼굴을 스치면
얼굴은 모호해지고,
모호해진 얼굴은 다시 기억을 부른다.
그의 입술에 닿지 못하고,
공기 속에서 조용히 풀려난다.
밤이면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 대신 떠오르는 것은 몸의 표면,
피부의 가장자리,
살갗 사이사이에 쌓인 작은 모서리들이다.
모서리들은 서로를 기억하려 애쓰지만,
기억은 언제나 비틀거린다.
비틀거림은 약속을 밀어내고,
약속은 숲 속을 떠돌고 있다.
그는 걷는다.
걷는다는 것 안에는 묵묵함이 있다.
묵묵함은 때로 폭력 같고,
때로 구원 같다.
걷는다.
숲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이른 새벽의 공기 속에서
나뭇잎들이 서로의 숨을 주고받는다.
그의 발밑에는 젖은 흙과 낙엽,
그 위로 부서지는 빛들이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는 바람은
언젠가의 목소리를 닮아 있다.
그는 그 바람을 쫓아 걷는다.
바람은 그가 걸어온 길과
그가 지키지 못한 약속의 잔해를 이어준다.
약속은 이끼처럼 느껴진다.
촉촉하고, 손끝에 남지만
붙잡으려 하면 흩어진다.
그는 한때 그 이끼를 주워
돌 위에 올려두었다.
그 돌에는 아직 손의 온기가 남아 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숲의 소리들이 따라온다.
부러지는 가지,
흙을 밟는 발자국,
새의 울음,
멀리서 울리는 물소리.
그 모든 소리가 모여
하나의 숨처럼
그의 가슴 안으로 흘러든다.
그 숨은 그가 지키지 못한 약속의 일부다.
그는 문득 멈춰 서서
한 그루 나무의 껍질을 만진다.
그 표면의 거칠음이 마치 오래된 상처 같다.
그 상처는 그의 것일 수도,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다.
시간은 나무와 사람의 상처를
같은 언어로 적는다.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이름이 사라지고,
대신 발자국이 남는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흔들며 지나갔다.
그 소리는 누군가의 '안녕'같았다.
그는 다시 걷는다.
걷는다는 것 안에는 묵묵함이 있다.
묵묵함은 나무들의 언어다.
그 언어는 번역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나뭇잎들이 떨린다.
그 떨림은 별빛 같고,
별빛은 그가 걸어온 시간의 그림자다.
그는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그림자 위를 걷는다.
지키지 못한 약속은 마지막에 말한다.
말은 소리가 아닌 잔향으로 남는다.
그 잔향이 그의 뼈속에 스며든다.
그는 그것을 짊어지고 걷는다.
걸음은 계속되고,
숲은 계속 흔들린다.
흔들림 속에 남은 것은
그의 발자국, 그리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기다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