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黑)과 백(白) 내 안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전쟁
"가장 자연스러운 조합은 늘 흑과 백의 조화였다.
태초부터 정해진 질서처럼."
빛과 어둠은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끝내 함께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이 두 색의 이야기로 채워져 왔다.
전쟁 같은 동화, 대립 같은 균형,
그리고 모순 속의 아름다움 혹은 잔혹한 동화처럼.
나는 늘 검은색을 입고 다닌다.
옷을 처음 만들던 시절부터, 무너질 때까지
내 손끝에는 언제나 검은 천이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색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이제 검은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나를 대변하는 언어가 되었다.
사계절을 검은색만 입으니 사람들의 입에서
한 번쯤은 물어보던 질문은 그러했다.
" 시안씨는 왜 그렇게 검은색만 입고 다녀요?"
" 친절해 보일까 봐요."
늘 영화 속 금자의 대사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짧은 싱거운 웃음들을 날리고
끝나는 질문과 답이었지만,
나는 아직 살아가며 이만큼 쉬크하고
괜찮은 대답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친절해 보이는 외모도 아니지만 이왕이면
강성인 나를 드러내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백(白)은 여전히 마음속 베이스로 깔려 있지만,
손끝에서 잡히는 일은 드물어졌다.
어쩌면 나는 이미 흑(黑)의 편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늘 세상은 언제나
두 색의 균형을 요구했다.
흑이 너무 깊어지면
백이 고요하게 번져 들어왔다.
흑이 나를 삼킬 듯 다가오면,
백은 조용히 나를 비춰주었다.
그 두 색의 경계 위에서
나는 늘 흔들리며 살아왔다.
어떤 날은 흑의 바다에 잠기고,
또 어떤 날은 백의 파도에 밀려갔다.
하지만 그 모든 움직임이 모여
결국 나의 바다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정하는 마음의 항로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으로 실패라는 쓴 물을 맛본 후
묵묵히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마왕이 이끄는 군함을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미술관의 하얀 벽 위,
검은 마왕의 군함들이 떠 있었다.
시선을 달리 보면 그것은
손에 잡아 들 수 있는
장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림 속의 배는 묘하게 낯익었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조립했던
플라스틱 군함들과 비슷했다.
나는 그림을 한참을 바라봤다.
하얀 물결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며,
그 검은 군함들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저 군함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흑이라는 섬일까
백이라는 섬일까.
아니면 그 둘 사이,
이름 없는 바다를 떠도는 중일까.
아니면 잠시 표류 중인 것일까.
한참을 바라보다가
몸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휘청거리며 시선을 달리해 보았다.
마치.
선택이 힘든 항로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 내 모습처럼.
방향감을 잃은 고장 난 나침판처럼.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그 항로 위를 걷는 일이다.
빛과 어둠 사이, 그 끝없는 경계 위에서.
누군가는 흑의 깃발을 달고,
누군가는 백의 노를 젓는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배는
회색의 물결 위를 흘러간다.
그곳에는 정답도, 목적지도 없다.
다만 살아남아야 하는
마음의 전쟁이 있을 뿐이다.
내 마음의 바다에서 ‘마왕의 군함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검은 돛을 단 배들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부숴버릴 최첨단 무기와
무엇이든 잡아내는 레이더를 달고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거만 같은
두꺼운 강철갑을 두른 압도적인 군함들이었다.
삶이라는 바다 그 살벌한 전쟁판에
나의 배는 초라한 것이었다.
그 선미에는 유혹이,
낡은 돛에는 욕망이 달려 있었다.
마왕의 군함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쉽게 부서져 내릴만한 배였다.
그 배들은 내 안의 소박한 바다를
지배하려 들었다.
나를 설득했고, 나를 흔들었고,
때로는 달콤하게 속였다.
" 지금보다 더 잘 살게 해 줄게.
더 많은 것을 너에게 줄게."
나는 그때 알았다.
어두운 군함 안 어딘가에 앉아 있을
마왕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늘 내 안에 머물며,
내 시선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군함들은 밤마다 밀려왔다.
불안, 질투, 미련, 욕망, 후회라는 이름으로.
모두 검은 선체에 실린
보이지 않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내 마음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너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넌 결국 실패할 거야.”
“그들은 널 떠날 거야.”
"마왕님의 손을 잡아."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그 목소리들은 마치 내 생각처럼 자연스러워서,
나는 오랫동안 그게 나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 군함들을 가라앉힐 수 있는 건
그들보다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침묵’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침묵은 어둠의 소리를 지우고,
마음의 파도를 잔잔하게 만든다.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바라보기로 했다.
군함들이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그렇게 마왕의 군함들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빛이 닿지 않는 먼 수평선 너머로.
빛과 어둠은 결코 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늘 서로를 비추며 존재했다.
흑이 없으면 백은 보이지 않고,
백이 없으면 흑은 의미를 잃는다.
그 경계에서 나는 내 항로를 찾았다.
흑과 백의 중간,
어둠과 빛이 부딪히며
회색으로 번지는 그 지점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마왕의 군함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늘 어딘가에 있다.
다만 내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내 바다를 흔들지 못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 군함들을 지켜보며,
스스로의 바다를 지키는 일이다.
빛과 어둠 사이를 건너며,
흑과 백 사이의 끝없는 항로 위에서
오늘도 나는 나의 배를 띄운다.
내 안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전쟁.
수많은 달콤한 말들로 유혹하는
마왕의 군함들이 즐비한
세상이라는 검은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끝없이 벌어지는 전쟁.
그것은 끝이 나지 않는 휴전이 없는
전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