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하임의 자장가

피리 부는 사나이

by 구시안



아주 먼 옛날,

벨하임이라 불리던 도시가 있었다.

하늘은 맑고,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였으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돌담 너머로 흘러나오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도시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깃들어 있었다.

풍요 속에서도 사람들의 눈빛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었고, 그것은 마치 오래된

저주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한

불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색 안개가 도시를 뒤덮었다.

안갯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반쯤 그림자에 묻혀 있었고,

손에는 오래된 검은 피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광장 한복판에 서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한 줄기 바람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그 선율에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들은 웃으며 사내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상인들도, 병사들도, 심지어 노인들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피리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는 잊혔다고 생각했던

첫사랑의 얼굴을 떠올렸고,

어떤 이는

죽은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속삭였다.

“그의 피리는 아름다워.

저건 분명 천상의 소리야.

마음을 위로하는 신의 선물이야.”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그 피리의 울림은 위로가 아니라,

잔혹한 유혹이었다는 것을.



벨하임의 시장은 오래전,

마을을 구원받기 위해

어두운 존재와 계약을 맺은 자손이었다.

그 계약은 단순했다.


"백 년마다 백명의 혼(魂)을

바치지 않으면,

이 땅은 피의 잠에 들리라.”



사람들은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백 년을 사는 사람은 도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계약은 묵인된 계약처럼 세월에 새겨졌고

피리 부는 사나이는 그 계약을 잊지 않았다.

그는 약속의 집행자이자, 어둠의 수확자였다.



그날 밤, 도시의 종이 세 번 울렸다.

달은 핏빛으로 물들고,

골목마다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고도 슬픈,

그러나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음률이었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 창문을 열고

맨발로 거리로 나왔다.

그 뒤를 어른들이,

노인들이, 심지어 몸이 불편한

도시의 병자들까지 그 피리 소리를 따랐다.



모두가 꿈속을 걷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하게 걸었다.

그들의 눈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심장은 피리의 박자에 맞춰 느릿하게 뛰었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피리 부는 사나이의 눈빛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피리를 불고 있는 그의 입가엔

입술이 한쪽으로 올라간 모양으로

섬뜩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사내는 그들을 이끌고

도시 밖의 검은 숲으로 향했다.

그 숲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곳을

‘죽은 자의 숨이 머무는 곳’이라 불렀다.



그 안에는

나무도, 새도, 달빛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끝없는

어둠과 낮게 깔린 속삭임만이 있었다.



“ 이곳은 당신을 위한 지상낙원이자 무릉도원.

지친 자여. 나에게 들어오라. 모든 것이 편안해지리라. ”



그 속삭임은 사내의 피리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영혼을 부르는 주문이었다.

사람들이 숲 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발밑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몸을 감싸며

서서히 그들의 형체를 녹였다.

그리고 피부 아래에서 빛나는 혼이

천천히 피리 쪽으로 흘러들었다.

그 빛은 사라지는 마지막 숨처럼 흔들리다,

이내 피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이미

피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사내는 피리를 입가에 대고

마지막 곡을 불었다.



그 피리에서는

수많은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아이의 웃음이.

여인의 탄식이.

병자의 울음이.

병사들의 고함이.

모두가 한 곡의 음악으로 녹아들어,

세상을 잠재웠다.



그는 피리를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피리 속에서 한 점의 빛이 깜박였다.

그것은 방금 삼킨 영혼들의 잔향이었다.



도시의 종이 다시 울렸다.

그 울림은

마치 누군가의 심장이 멎는 소리처럼

공기를 갈랐다.

사내는 피리를 어깨에 메고,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도시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아이도, 어른도, 심지어 시장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 피리소리가 아직 들려....”

밤이 되면 바람이 불 때마다

낡은 피리의 울림이 들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그 소리는 점점 더 멀리 퍼져나갔다.



그 후로,

사람들은 그 노래를

‘벨하임의 자장가’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포근한 잠을 재우는 노래가 아니었다.

듣는 자의 영혼을 깨워,

어둠의 행렬에 다시 불러내는 노래였다.


그리하여 벨하임은

다시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으나,

그것은 단지 다음 약속의 때를 기다리는

고요한 기다림일 뿐이었다.


벨하임에 사람들이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멀리, 산 너머의 또 다른 도시에서,

희미한 피리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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