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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피자 Feb 29. 2020

기억과 망각

 기억력이 좋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리 펼쳐졌을까. 시험마다 높은 성적을 얻고, 명문대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과 좋은 직업을 갖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지금보다 더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고 풍요로워질 테니 떡볶이를 먹을 때 몇 천 원 더 내는 것에 망설이지 않고 치즈 사리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완전하지 못한 기억력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거라 생각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망각의 덕을 볼 일이 많아진다. 삶이 계속되다 보면 겪고 싶지 않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릴 일도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불을 발로 차게 만드는 창피한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되거나 아주 흐릿하게만 남는다. 누군가에게 분노와 원망이 치밀어 오르던 기억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도저히 꺼낼 자신이 없어서 아예 외면하고 지냈던 고통의 시간들도.
 
 엄마의 병세가 상당히 악화됐던 무렵이 문득문득 단편적으로 떠오르곤 한다. 뼈 전이로 인해 거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엄마의 모습. 그런 엄마 옆에 온종일 붙어서 간병을 했던 내 모습. ‘그래, 이런 일도 있었지’ 싶다. 그때의 기억도, 그때의 기억과 함께 따라오는 괴로움도 많이 희석됐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쩌면 내 뇌는 나를 엄청나게 아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나 열심히 지우개를 쓱싹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어떻게든 나를 보호하려고, 슬픔에 잠식되지 않게 하려고, 행여라도 고통을 감당하는 데에 지쳐 내가 사는 것을 관두지 못하게 하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뇌는 원하는 것들로만 골라서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다. 내 몸에 달린 나의 뇌인데, 내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게 새삼 이상한 것도 같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지워지지만, 잊으면 안 될 것,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것도 서서히 옅어진다. 애초에 기억이란 것이 지우고 싶은 기억과 남겨두고 싶은 기억으로 딱 떨어져 나눌 수 없다. 괴롭지만 잊고 싶지 않고, 잊고 싶지 않으면서도 떠올리는 게 괴로운 기억. 엄마를 간병하던 시기는 특히나 그런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다. 힘든 시간이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도 소소하고 따뜻한 일들이 차고도 넘쳐났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때였다. 원래도 오락가락했던 핸드폰이 완전히 꺼졌다. 사실 핸드폰이 고장 나면 새 걸로 바꾸면 그만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안에 저장돼있던 내용물이었다. 그중에서도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었던 건 어느 짧은 영상이었다.  

 엄마는 아프게 된 뒤로 정말 성실히 운동했다. 틈만 나면 뒷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엄마를 혼자 보내는 게 불안하기도 하고, 엄마랑 같이 걷는 게 좋았기에 나도 열심히 따라다녔다. 쌀쌀했던 어느 날 모자를 쓰고 두툼한 옷을 입은 엄마가 운동기구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운동하는 엄마를 찍으면서 엄마도 웃고 나도 웃었다. 기껏해야 1분 안팎이었을 그 영상을 참 좋아했다. 그 안의 우리는 꽤나 즐겁고 행복했기에. 엄마는 원래도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프고 난 뒤로는 더더욱 원치 않았다. 나도 굳이 엄마가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의 사진을 찍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 영상은 엄마의 ‘최근’ 모습이 담긴 영상이면서 동시에 엄마의 목소리가 남아있는 정말 귀중하고 특별한 영상이었던 것이다.

 수리업체를 찾아가 데이터 복구에 대해 문의했다. 이 정도 고장은 데이터를 살릴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사실 그 영상을 포함해 핸드폰 안에 있던 자료들을 클라우드에 저장했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고장 나기 전이었는지 고장 난 후였는지, 내 실수로 그 클라우드 계정을 삭제해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부주의와 멍청함으로 정말 소중한 데이터를 잃어버린 것이다. 영영.

 사실 우스운 것은 이 에피소드 역시 온전한 기억으로 적은 것이 아니다.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적었음에도 전부가 팩트인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엄마의 유일한 동영상을 나의 부주의로 날렸다는 죄책감에 이 부분에 대한 기억마저도 외면하려 한 건지 모르겠다. 만약 지금 그 영상을 보관하고 있다 해도 자주 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그 영상을 잃은 지금은 오히려 주기적으로 그 영상을 머릿속으로 재생해본다. 최대한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을 긁어모으고 쥐어짜 내서. 이렇게 종종 불러내도 앞으로 내 머릿속 영상은 점점 더 흐려지겠지.

 엄마와 헤어진 시점이 점점 더 먼 과거가 될수록 기억의 선명도가 조금씩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지금은 나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10년 후, 20년 후에도 그럴 수 있을까? 이러다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까? 언젠가 완전히 기억나지 않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 때가 올까 봐 두렵다. 정말로 무섭다. 아픈 기억들 섞여도 괜찮으니 엄마에 대한 기억이 최대한 오래도록 생생히 남아있어 주면 좋겠다. 지우개가 조금만 천천히 움직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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