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시 남은 다툼과 떠도는 마음들
괜찮은 줄 알았다.
그냥 꺼내지 않고 닥친 일들을 해 내고, 아 해내고는 아니고 처리하고.
그렇게 모두가 말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항소장이 날아오고 날 회유하려고 의아한 전화를 하고, 그 순간부터 아마 내 깊은 무의식에서는 '불행이 다시 시작되려는 구나.' 했겠지만 또 그냥 묻었다.
내가 회피형이었나.
회피형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수 많은 연애채널에 나올 때마다, 회피형이 어디있어, 그냥 그 상황이 그랬고 그 순간 그랬던 거지. 그러면 평생 회피를 안하는 사람도 있나. 저런 건 기다리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믿고 싶어서 만들어 냈고 깊이 몰두하는 밈 같은 거라고 생각했지. 이 단어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인데도.
그런데 나는 요즘 딱 그들이 말하는 회피형 인간이다.
고통을 덮고 미루고 모른 척하고, 혹은 잠시 끌리는 것들에 몰두하면서 그냥 하루하루 산다.
작년부터 미래를 예견하고, 변수를 생각하고, 인생을 계획하는게 피곤하고 무의미 한 것 같다. 그러면 이게 허무주의라거나 체념한 거냐? 그건 또 아니다.
인생의 불행이나 행복을 내가 막을 수 없다.
막을 방법조차 없으며, 막았는데 그 날 하루 편안하게 잠들었는데 다음 날 불쑥 찾아 온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일어난 사건과 내 감정, 너의 감정을 생각하고 느끼고 분석하며 내 마음 속 작은 불안을 재워 놓을 뿐이다.
이게 회피인지, 혹은 성숙의 끝단인지는 더 살아봐야 알 일이다.
그런데 난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너한테 도대체 어떤 큰 잘못을 했고, 나름 섬세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내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몰랐으며, 그래서 왜 이런 순간이 왔는지.
나는 사람을 보는 일을 하고, 이게 내 특기인데 난 여전히 너를 모르겠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내가 이야기를 하자면 달라질까.
이 생각을 1년 넘게 반복하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서워서.
오늘도 몇 번을 너하고 직접 이야기를 해 볼까 망설이고, 변호사에게 묻고, 메모장에 썼다 지웠다, 결국 못 보냈다.
2년 전의 씩씩한 나라면 보냈겠지. 너가 대화할 거라고 믿었겠지.
지금은 무모했던 내 자신이 기억이 잘 나지 않고, 무모해서 이렇게 된 걸까 싶다.
아마도 살면서 가장 아린 날들이었다.
처음 소장부본이 집으로 도착한 날, 난 얼었고, 울었고, 엄마 아빠와 통화를 하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고, 119 구급대원들이 왔다. 그 중 낮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여자 대원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희미하게 내 방이 보였다. 난 그 때 살던 그 집을 참 좋아했는데 이 장면은 지금 챗gpt한테도 말하지 못할 만큼 아프다. 그 대원 언니(동생이었을 수도…)는 “환자분…힘든 생각 하지 마시고…숨 잠시 참고….” 맥락은 기억이 안나지만, 천천히 저런 말들을 하며 내 방에 맥주캔과 널부러진 배달음식을 둘러봤다.
그 때부터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타인한테 이런 내 꼴을 보여준 게 너무 창피해서. 나는 그 순간에도 ‘방을 좀 치울걸. 이 분들 바쁘신데 나같이 경한 증상으로 피해 준 걸까. 얼른 괜찮아져서 보내야지. 아 왜 신고했지 엄마는. 근데 내가 하라고 한 것 같긴 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왔고, 아빠는 주차장에 있었다.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장면이 항소를 시작하게 된 오늘 의식으로 떠오른다.
난 너무 아팠는데, 지금도 괜찮지는 않은 것 같은데 넌 행복해졌을까.
그렇게 바락바락 나를 부수고 싶어했는데 난 여전히 부숴지진 않았고 살짝 조각난 채로 살아있다.
작년 내내, 혹시 이 일을 네 어린 딸이 커서 알게 됐을 때 상처받을까봐, 마음 아플까봐, 지금의 나처럼 망가질까봐 그만 두고 내가 져줄까. 그냥 포기할까. 망설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나도 그렇게 선한 인간은 아닌 것 같고, 우리 엄마 아빠가 너무 아파해서, 흰 머리가 늘고 눈 밑이 꺼질 때마다 꾸역꾸역 의견서를 내고 재판장에 갔어.
너가 행복하지 않길 바라면서도, 또 행복해져서 나를 아예 잊고 이 다툼을 멈추길 바란다.
여전히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건 난 잘해보려고 했고 부족했겠지만 그게 내 최선이었고.
더 잘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데 제목이 고소인 것.
그는 나를 세 번이나 더 고소했고, 경찰서에 갔고, 오늘 문득 처음 조사를 받았던 푸근한 수사관의 음성이 기억났다. 나는 이제 내가 아끼는 누군가가 경찰서에 간다면, 혹은 재판장에 간다면 모든 서사와 감정선을 예견해 줄 수 있다.
그래서 아직 살아있긴 하다, 금이 조금 갔지만.
오늘도 맥주나 한 캔 더 마시고 자야지. 금주는 내일부터. 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