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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ch Dec 04. 2018

Harald Szeemann, 강박의 미술관

아트인컬처 2018년 3월호 'Abroad' ❶

하랄트 제만, 그는 동시대 미술을 시대정신이 표출되는 장으로 만든 장본인이자, 전시기획의 개념을 새롭게 세운 전설적 큐레이터다. 그가 생전 150여 개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강박적으로 모은 자료를 토대로, 제만의 전시 방법론을 증명하고 미술사적 의의를 밝히는 전시가 등장했다. 전 세계 순회를 앞둔 <하랄트 제만: 강박의 미술관>(게티센터 2. 6~5. 6)과 연계전 <대부: 우리와 같은 개척자>(ICA LA 2. 4~4. 22)전의 첫 개막을 기념하며, 제만이 현대미술사에 남긴 족적을 추적해본다. / 한지희 기자


본문 첫 두 페이지. 오른쪽 사진 속 인물이 하랄트 제만이다.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은 20세기 미술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존재다. 1957년 큐레이터로 데뷔한 이래 2005년 생을 마감하기까지, 50여 년간 전 세계를 무대로 150회가 넘는 전시를 기획하고 조직했다. 큐레이터로서 제만은 미술사의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했다. 기존 전시공간에서는 소화하지 못했던 실험적인 주제와 미술사조를 전방위로 포섭했다. 뿐만 아니라 시각문화 영역 외의 작업을 전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거나, 하나의 주제로 시대가 다른 작품을 함께 다루고, 완성된 작품이 아닌 현장에서 작품 제작 과정을 중계하듯 보여주는 등 혁신적인 전시 방법론을 도입했다. 또한 그는 독립큐레이터라는 개념을 창안한 장본인이자 개념미술,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을 육성한 미술의 개척자다. 하랄트 제만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20세기 현대미술을 논할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스앤젤레스 게티센터에서 열린 <하랄트 제만: 강박의 미술관(Museum of Obsessions)>전은 제만이 집대성한 아카이브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큐레이터 경력을 낱낱이 살핀다. 그를 거쳐 간 주요 전시의 문서와 시각자료가 한 자리에 집결했다. 전시는 제만의 커리어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 시기별 기획에 어떤 특징이 두드러지는지 조명한다. 이 기준에 따라 전시구성도 3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첫 번째 섹션 ‘아방가르드’는 제만의 초기 전시와 1960~70년대 초 아방가르드 예술 관련 기획을 다룬다. 두 번째 섹션 ‘유토피아와 선지자들’은 전통적인 모더니즘의 서사를 재구축했던 1970~80년대 전시를, 마지막 섹션 ‘지리학’에서는 스위스 출신인 제만의 정체성과 여행을 향한 열정, 국제 미술의 흐름을 읽는 폭넓은 시야, 그리고 1990년대 전시에 드러난 지역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주로 다룬다. 서신 사진 포스터 판화 행정서류 등 총 254점의 출품작을 통해 제만의 전시기획 의도와 이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 사고, 당시의 현장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강박의 미술관>전의 연계전시 <대부: 우리와 같은 개척자(Grandfather: A Pioneer Like Us)>도 ICA LA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제만이 1974년 자신의 조부를 주제로 발표한 동명의 기획전을 복원한 것. 제만은 전시에 출품한 오브제 수백 점을 자신의 아카이브에 고이 보관해왔고, 게티연구소는 3년간 연구와 복원작업을 거쳐 원 전시와 똑같은 규모로 재연했다.


오른쪽은 제만이 기획한 전시 출품작 및 전경, 아카이브 관련 이미지 모음이다. 


전설적 큐레이터의 탄생


우리는 두 전시를 통해 신화화된 제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까? 청소년기 연극에 몰두한 제만은 연극 음악 문학 시각문화 등 다양한 예술장르를 포용하는 총체예술을 지향했다. 그가 전시기획에 뛰어든 계기는 우연에 가까웠다. 제만을 눈여겨본 당시 쿤스트할레 베른의 관장 프란츠 마이어의 추천으로 1957년 세인트갈렌미술관에서 열린 <화가-시인/시인-화가(Painters-Poets/Poets-Painters)>전의 동시대 미술 파트의 기획을 도맡았다. 생전 그는 “작업 중에 느낀 강렬함 때문에 이것이 천직임을 깨달았다”라고 회고했다.1) 1961년에는 마이어의 뒤를 이어 쿤스트할레 베른 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만 28세, 유럽 내 최연소 미술관 관장이었다. 

    하랄트 제만은 관장으로 8년간 재직하면서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을 다루는 데 집중했다. 더불어 키네틱아트, 종교적 색채를 띠는 민속예술, 과학소설을 다룬 시각예술처럼 제도권 바깥에 머물던 작업도 전시로 소환했다. 그의 이름을 미술사에 아로새긴 <당신의 머릿속에 거하라: 태도가 형식이 될 때(Live in Your Head: When Attitudes Become Form)>도 이때 기획한 전시. 필립모리스의 후원으로 막대한 자금과 기획자의 자율성을 획득한 제만은 이후 자신의 입지를 극적으로 뒤바꿔버릴 전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작가의 태도나 아이디어에 급진적으로 접근하는 작가들이 미국과 유럽 전역에 대거 등장하는 현상에 주목했고, 개념이나 과정을 중시하는 젊은 작가 69명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 전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에 관한 아이디어 혹은 작가의 정신세계도 예술작품이라고 못 박는 선언이었다. 작가 대부분은 현장에서 작품을 설치했으며, 작품을 위해 전시장 내부를 훼손하기도 했다. 리처드 세라는 200kg가량의 납을 전시장 벽에 뿌렸고, 요셉 보이스는 전시장 모서리의 작은 틈새로 마가린을 문질러 넣었으며, 마이클 하이저는 레킹 볼로 건물 앞 보도를 파괴했다. 이 전시는 미술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관장직에서 물러났다.

    사임 직후 제만은 독립큐레이터로 거듭났다. 제도권의 간섭과 제약에서 벗어나 더욱 실험적이고 비전형적인 미술사조에 관심을 쏟았으며, 전시를 구현하는 방식에서도 변신을 꾀했다. <해프닝과 플럭서스(Happening & Fluxus)>(1970)에서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여 온갖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럼에도 제만은 그 혁신성을 인정받아 카셀 도쿠멘타 5(1972) 총감독으로 임명됐다. 그는 도쿠멘타를 ‘100일간의 전시’가 아닌 ‘100일간의 행사’로 쇄신했다. 특히 어떤 사조나 형식이 아니라 작품에 깃든 ‘개인의 신화’에 따른 큐레이팅을 선보여 주제전 형식을 확립했다고 호평받았다. 도쿠멘타 이후 제만의 행보는 기이했다. 그는 돌연 베른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조부 에티엥 제만의 삶을 다룬 <대부>전(1974)을 열었다. 헤어드레서이자 가발 제작자였던 조부가 소장한 미용 소도구와 가족사진 등 사적인 오브제 1,200여 점을 집안 곳곳에 빼곡하게 진열해 비 예술가였던 조부의 ‘예술성’을 부각했다. 그는 비전통적 전시공간에서 사적인 오브제로 전시를 만들면서 미술전의 본질적 의미, 기관의 역할, 오브제의 전시 방식에 관해 색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늘 새로운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하기를 강조했던 제만은 1973년 봄 ‘강박의 미술관’을 창설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가상의 기관에 다양한 주제와 접근방식을 적용했다. 일종의 생각을 실험하는 장소였던 셈. 제만은 이후 10년간 비주류 작가와 유토피아의 개념에 천착했다. <독신자 기계(The Bachelor Machine)>전(1975)에서는 근대 시각문화와 문학에 나타난 기계 미학의 성적 환상을 다뤘고, <진실의 산: 진실을 품은 가슴(Monte Verita: The Breasts of Truth)>전(1978~80)에서는 집 근처 몬테 베리타 지역에서 발생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깊이 파고들었다. 1983년 선보인 <총체예술을 향한 흐름: 1800년 이후 유럽 유토피아(Tendency toward the Gesamtkunstwerk: European Utopias since 1800)>전에서는 총체예술의 형식으로 유럽의 유토피아 개념을 가시화했다. 이러한 전시를 통해 제만은 치료사 엠마 쿤츠, 예술가이자 초기 게이 인권운동가 엘리사 폰 쿠퍼 등 기존 모더니즘 미술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던 작가와 미술사조를 발굴해냈다.

    제만은 1990년대 들어 국가나 지역의 정체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생 여행과 지리학에 심취한 그의 관심사에 딱 들어맞는 주제였다. <환영의 스위스(Visionary Switzerland)>전(1991)은 다양한 미감과 스타일을 구사하는 스위스 출신 작가 50여 명의 작업을 두루 선보였다. <장미덩굴의 오스트리아(Austria in the Net of Roses)>전(1996), <피와 꿀: 미래는 발칸반도에(Blood & Honey: The Future Lies in the Balkans)>전(2003)도 비슷한 방식으로 구성했다. 그는 각 지역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내기 위해 유물과 오브제를 최대한 많이 전시했다. 이러한 기획은 국제 미술계의 변방으로 여겨지던 지역의 예술을 재평가하는 전환점이 됐다. 1980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젊은 작가만을 위한 ‘아페르토’ 섹션을 개설해, 비엔날레와 국제 미술계의 원활한 세대교체를 꾀했던 제만은 그 후에도 리옹(1997), 광주(1997), 베니스(1999, 2001) 등의 비엔날레급 행사에 기획자로 참여하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


오른쪽 이미지 역시 제만이 기획한 전시 관련 자료. 가운데 열 맨 아래는 그르노블국립현대미술센터에서 2007년 펴낸 제만의 아카이브 연구서 표지다.


제만이 남기고 간 선물


<강박의 미술관>전과 <대부>전은 제만이 강박적으로 수집한 아카이브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그가 큐레이터로서 이룩한 혁신을 반추하는 동시에 미술현장을 담보하는 기록자로서 남긴 업적을 예찬한다. 게티연구소 현대미술부장 글렌 필립스, 전문연구원 도리스 천, 아키비스트 피에트로 리골로, 독립큐레이터 필립 카이저가 기획에 참여했다. 제만과 그의 아카이브가 지닌 미술사적 의의를 조명한 두 역사적 전시는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베른, 뒤셀도르프, 토리노를 포함해 유럽, 미국을 순회할 예정이다.

    하랄트 제만은 자신의 아카이브를 ‘강박의 미술관’이라 일컬었다. 그는 왜 이토록 강박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간직했을까. 그 기저에는 철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전시를 기획했던 개인적 성향은 물론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가 어렵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함께 작용했다. 지금과 달리 제만이 큐레이터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던 1950년대 말~60년대 초에는 오프라인 자료에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서점에 들러 책과 잡지를 구입했고 전시를 위해 작가나 기관과 주고받은 모든 서신과 행정서류를 보관했다. 전시가 끝나면 티켓, 안내문, 홍보문, 포스터는 물론 전시 전경과 부대행사에서 찍은 사진도 꼼꼼하게 챙겼다. 그의 아카이브에는 개별 작가에 대한 자료 폴더 2만 2,000개, 사진자료 3만 6,000장, 장서 2만 8,000권 등이 포함됐다. 전시 관련 폴더만 봐도 전시기획 및 조직 과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

    1986년에는 티치노주 마지아에 있는 옛 시계공장 건물을 인수해 아카이브 겸 사무실로 개조했다. 그는 외관이 분홍색인 이곳을 종종 ‘장미의 공장’이라 불렀다. 총 300m² 공간에는 8개의 방이 있었고, 자료의 성격 또는 주제별로 구분해 한 방에 몰았다. 워낙 규모가 커서 아키비스트 2명, 비서 1명을 두고 자료를 관리했다. 이들은 자료가 도착하면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사진을 찍거나 복사했다. 제만은 모든 자료가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범위 내에 있기를 원했기에 서랍보다는 서가 형태로 진열했다. 엄청난 양의 자료가 있었지만 눈을 감고도 서가 사이를 걸어 다니며 자료를 찾을 만큼 아카이브의 구조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아카이브가 단순히 실용적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고방식을 시각화한 공간이자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만은 “나의 아카이브는 나 자신의 역사 (…) 나의 회고록”이라고 정의했다.2) 오랜 기간 상상으로 존재하던 ‘강박의 미술관’을 눈앞에 구현한 셈이다.

    하랄트 제만이라는 인물의 역사이자 20세기 미술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인 까닭에 유족들은 ‘장미의 공장’의 향방을 쉽사리 결정짓지 못했다. 고심 끝에 2011년 소장품 관리체계와 시설이 잘 구비된 게티연구소에 아카이브를 인계했다. 자료를 옮겨 일렬로 늘어놓고 보니 그 길이만 해도 약 457m에 달했다고.3) 연구원들은 장장 4년간 자료 분류 및 정리, 보존처리, 목록화, 디지털 파일화 작업을 진행하고, 2014년 6월 말, 온라인으로 모든 자료를 공개했다. 이제 큐레이터, 미술사학자 등의 전문 연구원뿐 아니라 20세기 미술현장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만의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4) 그가 남기고 간 선물 말이다.


1) Hans Ulrich Obrist “Mind over Matter: Hans Ulrich Obrist Talks with Harald Szeemann” Artforum International 35(November 1996), pp. 72~29. 《큐레이팅의 역사》(송미숙 옮김, 미진사) 참고.

2) 앞의 글.

3) http://www.getty.edu/research/special_collections/notable/szeemann.html

4) http://archives2.getty.edu:8082/xtf/view?docId=ead/2011.M.30/2011.M.30.xml 일부 자료는 연구소 현장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원고 작성, 편집: 한지희

감수: 김재석

디자인: 진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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