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개벽] 창간사 - 2020년 겨울호
[다시개벽]은 백 년 전 [개벽]의 복간이다. 잠들어 있던 용암이 큰 지진을 통하여 분출하듯이, 억눌려 있던 생명의 꿈은 역사의 위기 속에서 그 본모습을 드러낸다. 백 년 전 [개벽]이 그러하였다. 안으로는 봉건 제도의 억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배 이데올로기, 밖으로는 서구에서 밀려오는 근대 물질문명과 제국주의 침략이 인류사적인 위기를 낳았다. 그 안팎의 위기 속에서 [개벽]은 모든 종류의 변화를 모색하는 전 세계 담론의 첨예한 각축장이자 거대한 용광로로 기능하며, 당대의 세계적 위기를 한국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위기의 극복 방향을 한국의 목소리로 제시하였다.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지금에 다시 인류사의 위기가 안팎으로 닥쳐온다. 이에 [다시개벽]은 [개벽]을 다시 연다.
지금의, 한국은 경제 선진국이자 자살률 최상위 국가이다. 과학기술-자본주의 문명이 심화될수록 인류의 영성은 메마른다. 고대 플라톤주의-중세 신학-근대 이성 중심주의로 이어지는 서구 사유의 흐름은 영성을 황폐화시켰다. 그 양상의 극단에 한국이 있다. 이를 넘어서 영성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
특히 근대 이후 인류의 생활 방식은 생태계 착취에 토대를 둔다. 현재와 같은 생산과 소비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구의 모든 생명이 공멸하리라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지구의 전 생명이 일찍이 겪은 적 없는 생태계와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위기를 초래한 사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남성-이성애-서구-성인-자본가-인간이 나머지 생명을 억압해 온 역사다. 그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전 지구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서로 다른 별들이 모일 때 별자리의 참모습이 나타나듯이, 지구 생명공동체의 억압받는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역사적 억압의 맥락에 따라 독특한 변혁의 사유를 창출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공동체를 상상케 할 것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위기를 초래한 서구적 사유의 모방하는 데서 근본적으로 탈피하여 새로운 사유를 창조해야 한다. 그리하여 서로 경쟁하고 죽이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서로 모시고 더불어 사는 역사로 바꿔야 한다. 『다시개벽』은 그 방향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서구 이론에 맹목적이고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한국 인문학 담론의 현실을 통렬히 비판한다.
둘째, 한국 인문학계의 서구중심주의 속에서도 자생적 사유를 시도했던 흔적을 재검토한다.
셋째, 지구 생명의 전면적인 위기를 야기한 인간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민족-국가중심주의로부터 포스트휴먼의 사유, 지구적 사유, 민족 횡단적 사유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넷째, 한국 자생 사유가 창조적 주체성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인류사적 위기 극복을 위한 세계적 보편성까지 갖추고 있음을 다시개벽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위의 지향점에 따라 [다시개벽]은 네 가지 물음을 순환적으로 물으려 한다. 겨울호는 ‘영혼의 탈식민지화’라는 주제로, 서구 지향적 사유의 한계가 무엇이며 그것을 탈중심화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할지를 물을 것이다. 봄호는 ‘한국 자생적 사유의 발굴’을 주제로, 한국의 관점에서 지구 보편의 대안적 사유를 창조했던 흔적과 흐름을 탐문하고자 한다. 겨울호는 ‘지구학’이라는 화두로,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 서열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인류의 다양한 지혜를 모으고 연결하며 서구 근대 문명의 극복을 위한 논리를 찾을 것이다. 여름호는 ‘신인간학’을 모색하며, 여성·성소수자·유색인·아동·장애인·노동자 등,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서 억압받아 온 사람들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변혁과 창조의 사유를 갱신하고 확장한다.
‘개벽’은 동학(東學) 전에도 쓰던 말이나, ‘다시개벽’은 동학에서 창조한 개념이다. 처음 지구가 개벽한 것과 같은 개벽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여기의 위기를 넘어서기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다시개벽은 개조보다 근본적이고, 발전보다 뿌리 깊으며, 혁명보다 창조적이다. 『다시개벽』은 한국의 역사와 장소와 공동체가 널리 지구 생명을 모시고 살릴 수 있는 사유의 실험장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는다. 생명이 생명답게 사는 우주가 보일 때까지, 끝없이 새로운 학문의 다시개벽!
[다시개벽] 편집위원진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