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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Oct 17. 2021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 지구인문학

[지구인문학연구소 칼럼]

조성환·허남진 

지구인문학연구소 연구원/소장 겸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원 



‘지구화’ 개념의 대두 


1990년대부터 서양학계에서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상어가 되다시피 한 ‘globalization’이 그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기술적으로는 교통과 통신(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globalization’은 처음에는 ‘세계화’라는 번역어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 때 ‘세계화’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의 세계적 전파다. 김영삼 정부에서 슬로건으로 내건 ‘세계화’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있다. 이 중에서 특히 후자는 ‘국제화’라는 용어와 상통하고, 이를 위해 영어교육이 강조되었다.1


그러다가 ‘지구화’라는 번역어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울리히 벡의 <Was ist Globalisierung?>(1997)가 아닐까 싶다. 영어로는 “What is globalization?”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우리말로는 <지구화의 길>(2000)로 번역되었다. ‘세계화’가 아닌 ‘지구화’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globalization을 ‘세계화’라는 좁은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화’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globalization의 자본주의적 측면만을 가리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globalization은 정보, 문화, 통신 등 전 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자가 당시에 익숙한 ‘세계화’라는 말 대신에 ‘지구화’라는 표현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세계화’가 지구화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도 경제적인 면이 강조된 개념이라면, 울리히 벡이 말하는 지구화에는 ‘위험’이 강조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위험이 지역이나 국가를 넘어서 지구적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위험의 지구화”(globalization of risk)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1986년의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부터 제기하고 있다. 우연하게도 이 해에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일어났다. 이 때 발생한 방사능 낙진은 바람을 타고 미국 동부까지 날아갔다고 한다.2 반면에 한국에서는 산업화로 인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한살림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구화의 연구 분야


지난 20여년 동안 서양에서는 ‘지구화’라는 주제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가장 최근의 연구로는 맨프레드 스테거(Manfred B. Steger)의 <Globaliz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University Press, 2020)을 들 수 있다. 2003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전 세계 20개국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올해에는 제5판이 나왔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지구화의 연구 분야가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알 수 있다.


What is globalization? (지구화란 무엇인가?)

Globalization in history (역사 속의 지구화)

The economic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경제적 측면)

The politic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정치적 측면)

The cultur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문화적 측면)

The ecologic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생태적 측면)

Ideological confrontations over globalization (지구화를 둘러싼 이념적 대립)

The future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미래)


여기에서는 지구화라는 하나의 주제를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생태의 각 분야에 걸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각각을 “지구화의 경제적 측면”, “지구화의 정치적 측면”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약에 이것들을 하나의 ‘학(學)’으로 독립시킨다면 지구경제학(global economics), 지구정치학(global politics) 등이 될 것이다. 실제로 역사분야에서는 최근 들어 ‘지구사’(global history)라는 새로운 영역이 확립되고 있다. 이것은 ‘국가’를 넘어서서 ‘지구’를 단위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지구역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지구화로 인해 일어나는 지구적 이슈를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지구학(Global Studies)’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미 지구학을 연구하는 지구학 센터나 지구학과, 또는 지구학회 등이 조직되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조지형 교수에 의해 2008년에 설립된 ‘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가 대표적이다. 국내의 ‘세계사’ 연구가 여전히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 하에, 지구적 조망과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지구사’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한편 서강대학교의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는 연구소의 영문 이름이 'Critical Global Studies Institute(CGSI)'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지구학을 연구하고 있다. 주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지구적 기억’이라는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지구사로


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의 설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세계사’(world history)와 ‘지구사’(global history)를 구분해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종래의 ‘세계사’가 서구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서술되고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지구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양의 대표적인 지구사가인 세바스티안 콘라드(Sebastian Conrad)는 그의 <What is Global History?>(Princeton University, 2016)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구사’는 그동안 역사가들이 과거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해 왔던 도구들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확신에서 탄생하였다. (…) 특히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개의 ‘태생적 결함들’이 우리로 하여금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이 결함들의 기원은 19세기 유럽에서의 근대 학문의 형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첫 번째 결함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탄생이 (국민) 국가에 얽매여 있었다는 것이다. (…) 역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국사(國史)에 한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결함은 근대 학문분야가 지극히 유럽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 국가, 혁명, 사회, 진보와 같은 분석적 개념들은 구체적인 유럽의 경험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인) 언어의 이론으로 전환시켰다. (…) 지구사는 근대 학문의 두 개의 불행한 반점(=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pp.3-4).


여기에서 콘라드는 근대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은 19세기 유럽에서 탄생하였는데, ‘국민국가의 탄생’과 같은 유럽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에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지구사는 국가 중심과 유럽 중심이라는 두 가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지구사 연구자들이 ‘세계(world)’라는 말 대신에 ‘지구(glob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세계’와는 달리 ‘지구’는 서구중심주의에 오염되지 않았고, 국제적(international)이나 초국가적(trans-national)과 같이 ‘국가’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3


‘지구인문학’의 제안


콘라드의 비판을 더 밀고 나가보면, 종래의 사회과학 중심의 ‘지구학’도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지구성(Globality) 개념에는 인간을 제외한 비인간 존재들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의 역사가 디페쉬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지구화 담론이 인간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구시스템이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적(Homocentric, anthropocentrism) 사고에서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


여기에서 차크라바르티가 말하는 ‘생명중심적 사고’는 비인간존재들까지도 지구시스템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사고’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국가 중심의 근대적 인문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적 차원의 인문학을 지향하는 학문을 이 글에서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구인문학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여 인문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구인문학은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출발하며, 인간 중심이 아닌 지구 중심의 지구화를 학문적 모토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대표적인 지구인문학자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이다. 자신을 ‘지구학자’(Geologian 또는 Earth Scholar)라고 자칭한 토마스 베리는 지금까지의 학문들은 모두 인간이 지구를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지구의 목적을 위해 지구를 연구할 때가 왔다고 제창하였다. 지구를 착취의 대상이 아닌 사귀어야 할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5


아울러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생존권도 보장해주는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의 필요성을 제안하는데, 이 제안은 최근 들어 현실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017년 3월에 뉴질랜드에서는 세계 최초로 ‘강’에 인간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하였다. 왕거누이 강의 오염을 우려한 뉴질랜드 의회와 원주민 마오리족이 합작해서 지구법을 통과시킨 것이다.6


최근에 한국에서도 지구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을 중심으로 <지구를 위한 법학 :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지구중심주의로>(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가 출간되었다. 또한 인류학 분야에서도 종래의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beyond) 지구적 차원의 인류학이 시도되고 있다.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차은정 번역)가 그것이다. 원제는 “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으로 2013년에 나왔다. 부제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는’ 인류학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인류학도 지구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인류학’(Global Anthropology)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1910년에 나온 뤼시앙 레비브륄(Lévy-Bruhl)의 “How Natives Think”(원주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원용한 것이다(한글번역은 김종우 역 <원시인의 정신세계>). 레비브륄이 ‘이성’이라는 사유능력을 유럽인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면, 에두아르도 콘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서도 ‘사유’ 능력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고(beyond) 있다.


이처럼 현대 학문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지구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지구인문학의 분야도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는 ‘지구살림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단지 ‘문사철’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지구법학이나 지구인류학, 또는 지구민주주의나 지구종교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한국철학 속의 지구인문학


이와 같은 지구인문학적 문제의식은 한국철학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 추만 정지운과 퇴계 이황은 중국의 <태극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천명도>를 제작하였다. <태극도>가 태극에서 만물이 생성분화되는 과정을 도식적으로 그린 일종의 ‘음양오행도’라고 한다면, <천명도>는 우주를 하나의 ‘원’으로 도상화하고, 그 안에 인간과 만물을 배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 베리가 제창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의 도상화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천명도>를 고도로 추상화시켜 ‘원’ 하나만 남겨 두면 원불교의 ‘일원상’과 상통한다.


또한 조선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서양의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지구구형설과 지구자전설 등을 주장하면서, “세계의 중심은 없다”는 탈중화주의를 선언하였다. 그 뒤를 이은 최한기도 <기학(氣學)>(1857)이나 <지구전요(地球典要)>(1857) 등에서 사유의 중심을 중국에서 지구로 전환하고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현대 서양의 지구학이나 지구인문학이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었다고 한다면, 조선후기의 실학이나 개벽학은 중화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동학에서 시작하여 천도교, 원불교에 이르는 근대 한국의 개벽종교에서도 지구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구적 상상(global imaginary)’이나 ‘지구적 의식’(global consciousness)과 같은 개념을 찾을 수 있다. 해월 최시형의 “천지부모 만물동포” 사상, 소태산 박중빈의 ‘일원’과 ‘사은’, 정산 송규의 ‘한울안’과 ‘삼동윤리’, 천도교와 원불교의 사해일가(四海一家)나 세계일가(世界一家)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인간과 만물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세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지구공화’(地球共和)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94년에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은 <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문화는 숙명인가?>(Is Culture Destiny?)에서 동학이나 불교와 같은 ‘아시아적 가치’를 언급하면서 ‘지구민주주의’(global democracy) 개념을 제창하였다. 그가 말하는 ‘지구민주주의’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도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1927~1898)이 제시한 경물(敬物) 개념을 연상시키고,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생태민주주의’7나 ‘지구법’과도 상통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지구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 중심의 ‘인간세’ 또는 ‘인류세’에서 지구 중심, 생명 중심의 ‘지구세’로의 전환이다. 이러한 지구적 전환(地球開闢, Global Transformation)과 지구적 연대(地球共治, Global Governance)가 동반되어야 지구화로 인해 파괴된 지구시스템을 본래 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20년 8월 28일에 원광대학교에서 발표한 조성환·허남진, 「코로나 시대의 지구인문학」의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발표 원고는 다음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http://www.wth.or.kr/modules/bbs/index.php?code=pds&mode=view&id=49& M_ID=31


1. 이문재, 〈일그러진 YS 정권의 ‘세계화’〉, 《시사저널》, 1998.01.15.

2. 유철종, 〈(체르노빌 참사 30주년) 사상 최악의 원전사고…재앙은 진행형〉, 《연합뉴스》, 

3. Dominic Sachsenmaie, Global History, Global Debates, in: Connections. A Journal for Historians and Area Specialists, 03.03. 2005. 

<www.connections.clio-online.net/debate/id/diskussionen-582>

4. Dipesh Chakrabarty, “The Human Condition in the Anthropocene”, The Tanner Lectures in Human Values, Yale University, February 18–19, 2015, pp.141, 165-167.

5. 토마스 베리 저, 이영숙 옮김,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대화문화아카데미, 2014.

6. 〈뉴질랜드, 자연 훼손하면 상해죄…'지구법', 한국은?〉, 《중앙일보》(온라인), 2017.04.15.

https://news.joins.com/article/21478072

7. 가령 Roy Morrison 저, 노상우 역 생태민주주의, 교육과학사, 2005; 구도완, 생태민주주의 : 모두의 평화를 위한 정치적 상상력, 한티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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