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아침일기]
30년 동안 면벽 수도하던 끝에 '도통'을 한 도인이 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깨우쳤다."
그가 깨달은 인생과 세계의 진리를 설파하고자, 그가 시장-세속으로 내려온다.
그가 진리를 설파할 때, 시장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귀울일까?
처음 얼마간은 '무슨 일이야?' 하는 호기심에 모여들겠지.
그러나 이내, '웬 미친 놈이!' 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 시장이, 저 먼 조선시대쯤의 시장이라면
혹, 그 도인의 깨달음이 '먹혀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1세기, 그리고 21.2세기를 지나는 지금-여기에서
자극적인 가십성 볼거리를 찾아다니는 1인미디어 창작자에게가 아니라면
그 도인의 깨달음이 각광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도인이 '30년'간 면벽수도하면서,
세상이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을 염력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면, 30년간의 면벽이 소용없는 일이고
오히려 '시장 속'에서 살아가며 수도하는 것만 같지 못한 일일 테다.
어떠한 진리도 영원한 것은 없다.
오늘날, 광자(光子)의 속도를 치달리고 결합-분열을 거듭하는
- 현상적으로는 변화로 나타나는 - 세속=시장 속에서 유의미한 메시지는
그 시장 속에서 단련되고 교감하며 소통하면서 성장한 메시지가 아니면 안 된다.
독백이나 방백조차도, 시장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이해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시장 안에서 닳고 닳으며 영글어진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일은 결국, '시장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시장-사회' 속에서 태어나 '시장-사회' 속에서 죽어 가는 존재일 뿐이지만
그런 속에서도 '저마다의 꽃' 한 송이는 피워 보고, 돌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나, 수도(도를 닦음)하는 일이나
이변비중(離邊非中), 중도와 화쟁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화쟁이라 하면
저 신라의 원효가 설파한 최고의 설법이자 덕목이다.
얼핏 생각키로, '화쟁'이 아니면 제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걸
결국 99%의 평범한 인간은 '제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변비중의 진리는 그러한 오해를 깨뜨리라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고,
비범함이 잠재하지 않는 평범함은 없다는 말이다.
세상을 떠한 진리는 있지 않고
진리로 드러나지 않는 세상은, 아직 안전하지, 완전하지 못한 세상일 뿐이라는 말이다.
동학의 이치에
성령출세(性靈出世)라는 논리가 있다.
좁게 말하면, 이 세상을 떠난(환원한, 죽은) 사람의 '성령'이
그 후손이나 후학, 친척이나 친지들의 '심령'(心靈, 마음)
또는 평소에 그가 뜻을 두었던 '만물(萬物)' 속에 (살아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말이다.
'나를 향하여 제사상을 차린다'(向我設位)라고 하는
좀더 잘 알려진 동학의 이치의 배경이 되는 것이 이 성령출세의 이치다.
(성령출세의 배경이 되는 것은, '시천주(侍天主)'이다)
여기서 '성령'을 '진리'라고 해도 무방하다.(=시천주)
진리는 나를 통하여, 현상계를 통하여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는 진리가 먼저 있고, 현상계를 '통로'로 하여 그 진리가 드러난다는 말이 아니다.
진리와 현상계가 하나요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진리가 곧 현상계인 것도 아니다.
이것이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이치이다.
얘기가 한참 돌아서 왔지만, 결국은
오늘 여기의 삶에서,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잡다한 일들과 부대끼면서
깨닫는, 설파되는 진리여야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한울님 = 시천주)이지만
인간세상에서 살아가며, 인간노릇(페르소나)을 하며 살아가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의 본성(=외계인=한울님)을 잃지/잊지 않는 것,
다르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외로워하지 말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