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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22. 2023

다시, 개벽파의 시간

[오늘아침일기]

봄이다!

다시, 개벽파의 시간이다.


몇 년 전부터 우리는 '개벽파'가 한국 사회의 주류라고 말해 왔다.

누가 개벽파인가. 2017년 촛불혁명의 주역이 바로 '개벽파'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동학년(1894) 혁명의 주역이기도 했고, 

기미년(1919) 만세시위의 주역이기도 했다.

80년 광주항쟁의 주역도 '개벽파'였다. 

87년 민주항쟁의 주역도 '개벽파'였다.


무엇이 개벽파인가?

사람이 사람 노릇하며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개벽파이다. 

나도 사람 노릇 하고, 너도 사람 노릇 하고, 

우리 모두 사람 노릇 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사람들이 개벽파이다. 


누가 개벽파가 아닌가?

일본에 기대어 개화해야 한다고 주창하던 사람들이다.

중국에 기대어 서구를 견제해야 한다고 고함치던 사람들이다.

외세에 의존하고, 외래에 현혹되고, 외국을 공경(恐傾)하던 사람들이다.

식민 잔재의 자산과 이승만 친미정권의 비호, 그리고 미군정을 등에 업고 발호한

친미/경서구(傾西洋-미/이스라엘)의 기독교 세력,

그리고 서구에 기울어지는 세계사의 운동장 위에서 성장해 왔으며 

지금, 윤석열을 내세워, 식민지 시절의 그 안락과 광영을 역사의 정도로 자리매김하려고 드는

세력이 바로 '반-개벽파'이다. 


개벽파는 동학하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 불연기연이다. 

동학하는 사람들 중에 개벽파가 많다는 점에서, 개벽파는 동학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개벽파 중에는 동학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점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개벽파를 '개벽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동학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많다.

동학하는 사람들이 아닌 개벽파 자신은 자신을 '시민'으로 부르기도 하고

'활동가'로 부르기도 하고, '연구자' '직장인' '기독교인' '천주교인'으로 부르기도 하고

아무튼, 자기 정체성을 '개벽파'라는 말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스스로를 '개벽파'라고 규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개벽파의 눈에는 그들도 개벽파로 보인다. 

'부처님 눈에 부처님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이 동학하는 개벽파를 볼 때 (그 '보여지는 사람'이 제대로 된 개벽파라면)

시민이기도 하고 활동가이기도 하고, 기독교인보다 더 기독교인다운 비-기독교인

천주교인보다 더 천주교인다운 비-천주교인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시대가 달라지고, 그때 그때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성이나 기호가

달라지므로, 개벽파의 모습도 시대마다 달라지게 마련이다.


아무튼, 다시 개벽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니, 개벽파의 시간은 단 한순간도 중단된 적이 없지만,

물밑으로 흐르던 시간이, 물 밖으로 비상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윤석열 정부의 행태 때문이다.

진즉에 예고된 일이었고, 이미 그럴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이지만

지금 지치고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달아오르는 데 시간이 좀 걸리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사람 노릇인가?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의 발밑에 기어서도 안 되지만,

한국 사람도 일본인의 발밑에 조아리며 지내서도 안 되는 법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무슨 심정에선지,

일본인의 발밑에 기어서, 머리를 조아려서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그 뒷면에 다시 미국이 있다는 것을, 밝은 눈 가진 사람들은 지적한다.


1905년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여전히, 120년째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미국이 좀더 적극적으로 '제국주의 본국' 노릇을 하려 들고 있다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의 '미국 독식주의'가 점입가경인 상황이다.

중국을 최종 타깃으로 하여, 한국을 옥죄는 것이, 목불인견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사람 노릇'하기란 여전히 살얼음 걷기, 줄타기인 셈이다.


그러나

당당하게 살아갈 사람, 사람 노릇하기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위태로울 일이 없다. 좌고우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태롭게 느껴진다고, 두려움을 느껴진다고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사람 노릇 제대로 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럼에도 사람 노릇하는 길로 기어서라도 가는 사람이 있고

냅다 지름길로, 함정으로 향하는 그 길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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