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Mar 27. 2023

심고心告는 모시는 것이다

신성한 말 - 21


동학하는 사람들은 심고를 한다.


심고(心告)는, "마음으로 고한다"는 말이고, "마음에 고한다"는 말이다. 

이때 마음(心)은 곧 한울님(天主)이다(心卽天, 海月). 그러므로 심고는, 이심고심(以心告心)이고 이천고천(以天告天)*이다.     

[본래 동학경전에는'이심치심(以心治心)'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말만 나온다. 또 심고의 처음 표현은 '고천(告天)'이었다. '이심고심' '이천고천'은 이런 말을 참조하고, 심고의 의미를 생각해서 필자가 지은 말이다.]


고한다는 건, ‘알린다’는 뜻이고, ‘보고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알리고, 보고하나? 내가 하는 일거수일투족, 내가 먹는 생각 하나하나를 한울님에게 모두 알리고 보고한다. 그게 가능한가?  마음으로 하는 일이니, 해 보면 가능하다는 걸 안다. 마음은 ‘생각’을 포함하여, 이 우주에서 빛의 속도보다 빠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 안 될 것이 없다.  

[빛보다 빠른 것이 '유이'할 수도 있다. '양자얽힘' 현상이 그것이다. 이것은 유이한 것일 수도 있고, 유일한 것의 두 양상일 수도 있다. 빅뱅은 '시간+공간'의 생성 사건이다.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것의 두 양상이다. 마찬가지로 마음과 양자얽힘은 동일한 사건의 두 양상이다. 이신전심은 그 세속적 양상이다.]


왜 그래야 하나? 그게 ‘도리’(道理)라서 그렇다. 


어린아이가 집 밖에 나가 놀고 싶을 때, “엄마, 나 나가서 놀아도 돼?”라고 물어보고, “그래 1시간만 놀다 오렴!”이라는 엄마의 대답(허락)을 받는다. 친구들과 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 나 (놀고) 왔어요!”라고 말한다. 심고는 그런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아침에 “오늘도 열심히!”라고 말하고 서로의 직장으로 향하거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여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격려하며 마주하는 일도, 심고의 연장선상이다.  (혹은 ‘다녀올게!’하고 출근하고, 퇴근하여 ‘다녀왔어!’라고 하는 것도) 

사람이 곧 한울님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심고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사람과 만물 사이에, 심고가 오가야 한다.  밥을 먹을 때 하는 심고가 ‘식고(食告)’이다.  마찬가지로 ‘일어날 때 심고’ ‘잘 때 심고’ ‘올 때 심고’ ‘갈 때 심고’  ‘꽃을 만질 때 심고’ ‘하늘을 볼 때 심고’가 모두 필요하다. 


그걸 간과해서, 세상이 각박해지고, 지구가 위험에 처해졌다.      

-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동학(東學)이다.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는 일에도 심고가 필요하다. 아니, 사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이 심고 그 자체이다. '호흡법' '호흡수련'이 특화되어 있기도 하지만, 사실은 '호와 흡' 그것이 '전체(우주, 한울님)'와 소통하는 과정인 만큼, 그것을 '의식화(마음, 생각)'한 것이 심고인 셈이다. 


'무미건조'하게 '호흡'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성함'을 느끼고, 보답하는 것이 심고다. 

그래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상, 마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심고하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 내가 말하고 행동(하려고)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양심(良心)'에 거리낌이 없는지, 견주어 보는 일이다. 양심이 곧 천심이다. 천심에 비추어 보는 일이다. 


심고는 안으로 한울님께 하는 말이라면 (내유신령 內有神靈)

말은 밖으로 심고하는 일이다. (외유기화 外有氣化)

누구나 이것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각지불이 各知不移) (수운, 동경대전, 논학문)


내유신령 - 외유기화 - 각지불이하는 것이 곧 '모시는 것' 즉 시(侍)이다. 


모시는 일, 잘 하면,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떠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