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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23. 2017

“공유하기”와 “퍼나르기”에 관하여 묻다

- 인간이 ‘정보’ 확산의 숙주로 전락하는 중은 아닌가?

<출전 : [개벽신문] 67호 - 개벽의 창>


생각하는 꿈을 꾸는 사람 


1. 


『창조력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는가』(김대식-다니엘 바이스 지음, 박영록 옮김, 중앙 books)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한편으로 인간의 창조적 역량이 오늘의 물질문명을 가능하게 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엄청난 속도로 기술적 진보를 이루어나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인간이 본래 추구하고자 하는 ‘행복’의 증진/확산이나 ‘가치’의 심화/확장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의 ‘존재 확장’을 위해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해,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의 노예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 우리는 ‘정보’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오늘날 인터넷 상에서 이용자들의 가장 빈번한 일상 활동/행위 중의 하나인 ‘공유하기’와 ‘퍼나르기’ 행태에서 검증할 수 있다.


2. 


SNS가 이 시대 중요 ‘소통’의 매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공유하기’와 ‘퍼나르기’를 통해서 손쉽게 ‘콘텐츠를’ 재생산하고, 확산할 수 있게 된 점도 크게 이바지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기능은 단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 세계적 차원에 깊이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실이다. 


몇 년 전 아랍세계를 뒤흔들었던 ‘아랍의 봄’ 혁명이 가능했던 것도 그러하고, 멀리 갈 것 없이 최근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광화문 주변에 운집한 청중들의 다양한 오프라인 이벤트-퍼포먼스가 SNS를 타고 생중계 또는 무한 공유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마침내 ‘혁명’을 성공시킨 공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최근 들어 이러한 ‘공유하기’와 ‘퍼나르기’가 유용한 정도를 넘어서 ‘공해’화하거나 ‘폐단’으로 전락해 가는 것은 아닌가 우려되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적당하면’ 유용 하거나 효율적인 것도 ‘임계점’을 넘어서면 쉽게 부패하거나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거 의 필연적인, 그리고 ‘자연’적인 과정이다. 이때 과도기나 혼란기를 최소화하면서 그 과정을 ‘잘’ 돌파하면 새로운 차원이 열릴 수 있고, 폐단에 매몰되어 헤어나지 못하면 또 다른 불씨 내지 골칫거리를 떠안고 고단한 인생 / 힘겨운 세계(세상)을 건너가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후자에 가깝게 진전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3. 


많은 유용함이나 즐거움을 줌에도 불구하고, 최근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SNS의 공유하기-퍼나르기 기능의 폐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공유하기’는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생산한 정보를 소비-공유=확산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사고하는 수고를 생략하게 하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 ‘편리함’을 ‘문제’라고 명명하는 것은, 편리함의 대가로 지불하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가 없게 된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심지어 자기 자신의 전화번호를 말하는 것조차 버벅대는 등의 현상을 일컫는 ‘스마트폰 치매’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쉽게 (자기 생각과 유사한, 혹은 자기가 얘기하고 싶은 내용을 담은) ‘남이 쓴 글’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나도 생각했다, 또는 나도 글을 썼다’고 착각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자기 스스로의 ‘사고력’과 ‘창조적 역량’은 점점 감퇴하게 된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생각없음(thoughtlessness)’이 나찌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는 주장을 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한마디로, ‘생각 없는’ 껍데기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4. 


소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구축’이 가시화하고 진전되면서, 이제 컴퓨터는 ‘단순신속대량계산’이나 ‘데이터의 저장’이라는 1차원적인 기능을 넘어 고차원적인―그러므로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자부해 온―‘사고력’을 모방하고 어떤 영역에서는 인간을 초월하는 단계―초보적인 단계의 ‘창조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정체성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고 하는 우려-공포가 점점 자라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상황은 ‘컴퓨터-인공지능’이 기획하거나 유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신이 그러한 방향으로 스스로를 몰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치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 낭떠러지를 향해가는 ‘한 마을의 아이들’처럼, 우리는 ‘문명’이라는 ‘괴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아무 생각 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생각한다고 하지만 부처님 손바닥(물질문명-정보) 안의 손오공 정도의 깜냥으로 우쭐대면서 영원한 ‘고뇌’를 되풀이하는 길로만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무심코 남이 쓴 ‘좋은 글’ 혹은 ‘공유되기를 기다리는 소식’(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메시지 들)을 내 계정에 옮기거나 내가 만든 정보(행사 소식이나 내가 쓴 글)를 여기 저기 블로그나 밴드 등에 퍼 나르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무사고(無思考)’의 디스토피아를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5. 


인터넷 확산 초기의 ‘홈페이지 중심 시대’만 해도, 각자(개인, 단체)가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그 곳에 콘텐츠를 쌓아가면서, 방문객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름의 ‘능동적인’ 참 여가 우선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카페/블로그를 넘어 SNS(각종의) 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고사하고, ‘푸시’를 통해 입으로, 눈으로, 코로, 귀로 정보를 쑤셔 넣어 주는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페이스북 등에서는 이미 개인 맞춤으로 정보를 가공 선별하여 들이밀어 주고 있기까지 하다. 넘쳐나는 각종의 정보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내가 알리고 싶은 정보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비자(독자)에게 전달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6. 


이제 결론을 말할 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정보화시대의 인간은 ‘정보’라는 기생충을 옮기는 숙주 역할로 전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치나 생존, 그리고 진화나 생명 계승의 중심이 아니라, 유전자가 자기 보전과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혹은 생명체)이라는 숙주를 이용하는 것이라는 과학적, 철학적 견해는 이미 발표된 지 오래다.(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이제 유전자 대신(혹은 유전자에 더하여) ‘정보’가 인간을 숙주로 하여 자기 복제와 확산(씨앗 퍼트리기)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시대에, ‘나(=우리, 인간, 생명체)’는 어떻게 나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행복감을 누리며 가치를 생산/향유하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물음’이 시작된다. 


-- 

질문을 던지는 책, 질문하는 것이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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