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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25. 2017

동학을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

- 스스로 답하기를 능사로 삼지 말고, 묻고 물어 한울님의 답을 기다리자

<출전 : 개벽신문 68호 - 개벽의 창>


수운이 한울님과 문답한 용담정

창조력이란 무엇인가?


지난 호에 이어 <창조력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는가>(김대식/다니엘 바이스 지음, 박영록 옮김, 중앙Books)의 한 대목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에는 “앞으로 인간의 역할은 결과를 만들어내기보다는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쪽이 될 것이다”라는 경구가 적혀 있다. 


여기서 ‘앞으로’는 예컨대 ‘인공지능시대’로 대변되기도 하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직업’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예컨대 현재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사회에 진출할 즈음에는 65% 정도가 지금 이 시점에는 존재하는 않는 직업에 종사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기는 감성적인 영역까지 그 역할을 넓혀 오는 시대를 지칭한다. 빅데이터와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등이 결합하면서 ‘인공지능’의 위력은 문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다음 “인간의 역할”은 이 책(<창조력은 어떻게....>)이 주장하는 바, 인공지능시대에 인간이 ‘인공지능’에 비하여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 “창조력”을 발휘하는/발휘할 수 있는/발휘해야 한다는 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으로 인간의 역할은 결과를 만들어내기보다는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쪽이 될 것이다”를 필자가 이해한 방식에 따라 예를 들어 재(再) 서술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본격적인 컴퓨터 시대로 진입하기 전에 우리가 만난 가장 초보적인 ‘컴퓨터’인 ‘전자계산기’에 298758712375×98986263856=?라는 수식을 입력하면, 계산기는 ‘=’을 입력하는 즉시로 답을 내놓는다. 그것이 진화하여, 이 우주에 있는 원자의 숫자보다 더 많은 경우의 수를 갖는다는 ‘바둑’조차도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빨리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그때의 ‘알파고’는 인간의 수만 건의 기보(棋譜)를 ‘사전 학습’하여 그러한 능력을 갖춘 데 비하여 최근에는 아예 기본 규칙(흰돌과 검은돌을 번갈아 놓기와 집이 많으면 이긴다)만을 제시한 후 단 사흘 동안 ‘스스로’ 학습하여 ‘알파고’에게 100전 100승을 거둔 신형 알파고(‘알파고 제로’)까지 등장하였다. 


이 책(<창조력은 어떻게...>)는 이러한 ‘앞으로’의 시대에 인간 ‘생존’하기를 넘어 ‘생활’하고 ‘생생’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하여 요구되는 가치가 바로 ‘창조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창조력’이란 그러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논의를 해 둘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창조력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식으로 “생산력”과 연관된 개념이었다. 말하자면 ‘산업시대’의 개념이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창조력은 “현재의 상황에 결핍(needs)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내가 그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는 과정을 거쳐 “그 해답을 구하는 것”을 포함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이해되는 역량이다. 


수운 묻고, 한울님이 답하다 


동학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는 ‘공부(學)’이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의 끈질긴 물음에 한울님이 ‘답’함으로서 시작된다. ‘빅뱅’이 선천의 시작이라면 ‘후천’의 빅뱅은 바로 한울님이 수운의 물음에 답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이를 ‘동학’에서는 ‘天師問答’이라고 한다. ‘스승(수운)님과 한울님이 묻고 답하다’라는 뜻이다.)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執症)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즉 

(한울님이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수운이그 까닭을 물으니  (한울님이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수운이 다시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한울님이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여기에서 명백히 보이듯이, 동학은 ‘수운이 묻고 한울님이 답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 장면에 선행하는 ‘물음’이 있기는 하다. 

수운이 어렸을 때, 부친 근암공이 손님을 맞이할 때 어떤 손님은 문 밖까지 나와서 맞이하고 또 배웅하는데, 어떤 손님은 방안에 앉아서 맞이하였다가 방안에서 배웅하는 것을 보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행동합니까?”를 물었다고 한다.

이것을 굳이 수운(최복술)의 ‘비범함’(평등의식)을 예감하는 단초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은 어렸들 때 자녀들이 던지는 ‘질문(물음)’을 보고, “우리 아이는 천재가 틀림없다”고 감격하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이 그러한 ‘비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천성(한울님 성품)’이 아직 닫히지 않고, 티끌에 가리워지지 아니한 증거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따라서 ‘질문’은 한울님의 중요한 속성이기도 하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수운의 어렸을 때 물음보다 더 직접적으로 위의 장면에 선행하는 질문은 아마도 

“왜 이 세상은 이렇게 혼탁한가?” 

“이 세상을 건질 방법은 무엇인가?” 

“권력이나 술수나 재력이 아니라면, 무슨 도(道)로써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수운은 천하(天下=한반도 전역)을 두루 편력하면서 수많은 사람과 이론(유도, 불도, 도교나 참위설 등)을 섭렵하고, 그 속에서 위 질문의 해답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처음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길을 나섰던 자리 ‘용담(龍潭, 경주 현곡면 가정리)’으로 돌아와, 마침내 한울님의 ‘답’을 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동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어쩌면, 동학의 ‘시초’를 연 ‘질문’은 비범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하다. 돌아보라, 사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며, 그 질문의 범위가 나이 들수록 점점 ‘세속적인 것’ ‘이기적인 것’으로 압축되어 왔다는 점만이 문제될 뿐,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포함한 ‘질문’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동학을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라는 화두를 내세우는 까닭은 우리 시대에 ‘동학’을 새롭게, 신선하게 그리하여 다시 가열차게 ‘함께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동학’은 시대마다 새로운 과제에 응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혁명의 시대’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전면적인 ‘궐기’로, 근대 이행기에는 ‘종교’(서구적 의미)라는 옷을 입고 ‘제도와 교리’라는 틀로서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고자 하였다. 그 시대에는 또 ‘청년운동(청년당, 청우당)’을 통해 ‘청년’ ‘학생’ ‘여성’ ‘어린이’ ‘농민’ ‘노동자’ ‘상인’이라는 인간의 새로운 정체성에 입각한 ‘부문운동’으로써 시대적 요구(식민지로부터의 독립과 근대화)에 부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시대가 흘러 오늘, 이 ‘인공지능시대’에 인간의 자리가 어딘지에 답해야 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다시 동학으로부터 그 해답을 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한때 한반도 전역을 풍미했던 ‘동학(천도교)’가 오늘날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까닭은 동학하는 사람들(천도교인 포함)이 질문하기보다 ‘답하기’에 몰두하거나, ‘답하기’를 능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동학하자”고 하면, ‘답’하는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한울님’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다만 그 한울님은 ‘공중’이나 ‘삼십삼천 옥경대’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모셔져 있다. 이 지점이 ‘동학’이 ‘대중화(민중화)’할 수 있는 출발점이자, 또한 ‘동학하기’의 어려움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에 ‘동학하는 사람들’, ‘개벽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화두를 잡고 씨름할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한울님에게 묻고, 어떻게 한울님의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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