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신문, 72호 이후를 전망하며
『개벽』은 1920년 6월 창간되어 1926년 8월 폐간되기까지 발매 금지, 정간, 벌금 등 총독부의 온갖 압박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발간되어 통권 72호를 기록한 잡지이다. 『개벽』은 당시 전체 신문 잡지 구독자 수가 10만이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호 평균 8천부가 판매될 정도로, 놀랄 만한 대중성을 갖고 있었다.
『개벽』은 천도교청년회에서 발행하였다. 천도교청년회는 1919년 9월 결성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가 1920년 이름을 바꾼 것이다. ... 천도교청년회는 1923년 9월 천도교청년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개벽』지는 천도교 청년단체에서 발간하였지만, 천도교청년단체의 기관지라기보다는 일반 시사문예 잡지의 성격이 더 강했다. ...
『개벽』은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받아 발간되었다. ‘신문지법’이란 1907년 통감부에 의해 만들어진 ‘광무신문지법’을 말한다. 고등경찰과장 전중무웅(田中武雄)은 “원래 『개벽』 잡지로 말하면 종교잡지로 출현되었으나, 점차 정치를 언론하게 되어 논조가 항상 불온하므로 주의도 여러 번 시키고 발매금지도 여러 번 시켰다.”고 했다. 이를 보면 『개벽』이 종교잡지로 출발했으나, 실제로는 학술 · 문예에 관련된 기사들을 실었고, 시사와 학술적인 내용의 글들도 많았다.
이후 1922년 9월 15일 『개벽』은 『신천지』, 『신생활』, 『조선지광』과 함께 보증금 300원을 내고 시사문제를 다룰 수 있는 잡지로 허가를 받았다. 『개벽』 편집진은 이에 대해 “『개벽』은 이제부터 정치 시사를 해금케 되어 래월 호부터는 금상첨화로 새로운 기사와 새로운 면목으로 독자의 앞에 신운명을 말하게 되었나이다. 우리들은 이것으로써 스스로 『개벽』의 신기원이라 하여 모든 것을 신기원답게 활동하려 하나이다.” 라고 그 변모의 의미를 스스로 천명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개벽 [開闢]
네이버 지식백과에 실린 <개벽>지에 대한 소개의 일부이다.
<개벽신문>은 이 <개벽>지를 계승하여 복원/복간하고자.
2011년 4월 5일 자로 창간호(복간호)를 발행하고
2017년 12월호로 70호를 발행하게 된다.
'시사' '종교' '문예' '학술' 등의 콘텐츠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개벽>이라는 제호로 담아내고자 했던 동학의 "다시 개벽"의 정신과 비전과 의지를
계승하는 것이 중심 목표이다.
<개벽>을 처음 발행하던 일제강점기에는 <개벽>지를 발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었다.
이 시대에 <개벽신문>을 발행하는 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운동"이다.
당시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민족적 역량의 구축)"이 운동의 1차 목표였다면
이 시대에 <개벽신문>을 만드는 운동의 1차 목표는 <생존>하는 것이었다.
[개벽세상을 꿈꾸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강한 놈이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놈이 강한 것이다.]
당시 <개벽>지는 "종합잡지의 효시"로서 당대의 첨단 이론과 시사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어 나갔다.
이 시대 <개벽신문>도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사람, 정의로운 연대"라는 슬로건이 표방하는 바처럼
필연적으로 이 시대의 전위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설 수 있다' 또는 '선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당위'요, 후자는 '현실'이다.
<개벽신문>의 현실은 <개벽>의 '계승' 내지 '복원'을 운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 현실이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의 <개벽신문>은
당시의 <개벽사>가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쯤의 환경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1926년경 <개벽>지가 종간호를 내던 당시라고 해도 개벽사 직원/기자는 20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개벽>의 강제 폐간은 사실,
<개벽사>가 처한 어려움이 외부의 환경에 노출되어 드러난 문제의 일단에 불과했다.
1926년 이후 <개벽사>는 주축 멤버들의 잇다른 죽음(아마도 과로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과
재정의 문제 등으로 급전직하의 쇠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이 돠었을 때 <개벽사>는 몇몇 직원들이
<개벽> 지 전성기를 재현하고야 말겠다는 결기로 버텨나가던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고 있었다.
언제 문을 닫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려움을 극한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
지금의 <개벽신문>은 아마도, 적어도 재정의 차원에서는,
당시의 <개벽사>가 이제 곧 사무실마저 내주고,
문을 닫아야 했던 1820년대 말~1930년대 초반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속에서 발행되고 있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당시는 일제의 외압이 십여 년째 계속되는 암흑의 시대였다.
<개벽사>의 후원 기관이던 천도교청년회/청년당과 천도교단은 오랜 내전(신구파 싸움)과 일제의 분열 책동에 시달려 역시 도움이되기는커녕 걸림돌이 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동학'과 '개벽'에 관한 한, 뚜렷한 "하강기"에 직면해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점에서 그때에 비하여,
<개벽>과 <동학>에 대한 여론은 "상승기"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개벽>지와 <개벽사>의 주체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내지 편집 역량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였고
<개벽> <어린이> 등 개벽사에서 발행되는 잡지들의 경쟁 대상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사와
<삼천리> 등을 비롯한 일부 잡지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경쟁 대상'을 꼽을 수조차 없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그리고,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미디어운동"의 흐름 속에서
<개벽신문>과 개벽신문 주체들의 역량은
그 존재감조차 없는 미미한 매체에 불과하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곧 <개벽신문> 72호가 발행된다.
72호는 당시의 <개벽>이 마지막으로 발행했던 <종간호>이다.
[물론 그 이후 개벽사의 편집장 '차상찬'이 '신간개벽'을 4호 발행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역시 '김기전' 등 이전 개벽사의 주축이 <개벽사>를 재건하여 <개벽> 복간호를 1~9호까지 발행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나 독자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신간개벽'이나 '개벽 복간호'를 발행할 당시의 개벽사 및 개벽사 주축 세력의 위상이 초기 <개벽>지나 <개벽사>의 위상에 한참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 가중 중요한 이유라 할 것이다.]
<개벽신문>은 72호에 이어 73호를 내고 그 다음 행보를 계속하면서,
이제, 잊혀졌던 "개벽의 꿈" 끊어졌던 "동학 세상으로의 행진"을 좀더 힘있게 해 보려고 한다.
"생존"이라는 1차 목표를 넘어서서, "존재의 이유"와 "존재의 가치"를 "발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벽의 꿈!"
<개벽신문>만이 "개벽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천도교라는 종교적 관점, '동학 실천 시민행동' 같은 시민운동 단체 '한울연대' 같은 또다른 단체들이
원불교사상연구원이나 동학학회 같은 학술 기관도
전국 각지의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들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한 실천과 행동, 담론과 연대들을 교합하고 있다.
그 속에서 <개벽신문>의 위치와 위상을 제대로 잡는 것이 1차적인 목표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개벽의 꿈"을 실현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 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사람, 정의로운 연대로 나아가는 소중한 길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의 참여와 연대와 지지(후원)을 기다린다.